-
[영상]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죽도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죽도산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에 자리잡은 해발 78.1m의 나지막한 산이다. 대나무가 많아 죽도산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육지와 동떨어진 섬이었으나 모래둔턱이 점점 쌓이면서 자연적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특이한 것은, 죽도산 전체를 이루고 있는 바위는 모래가 오랫동안 굳어져 만들어진 암석이다. 죽도산 정상에는 1935년에 처음 등대가 세워졌는데 일제 말에 철거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세워졌다. 당시 죽도산 등대는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 축산으로 들어오는 안내자 역할을 하며, 포항 장기와 울진 중간에서 북극성처럼 빛났다고 전해진다. 죽도산 등대는 2011년 5월, 높이 26.9m(7층) 면적 105.63㎡ 규모의 전망대로 새롭게 태어나 기존 등대 외에 동해안과 인근 축산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광복군합동묘소 추모조형물 ‘광복군전사상’에 대해서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여기 ‘광복군합동묘소’에 오면 참으로 초라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잔디가 살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 숲이 울창해서 좀 안됐다 싶어서 햇볕이 들게끔 정리를 하면서, 후학들이 많은 국민들이 여기를 오시는데, 안내해설사들과 같이 오십니다. 그런데 여기를 설명할 때, ‘우리 광복군 선열들을 설명할 때 뭔가 눈으로도 설명이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저희가 공모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 광복군의 상징을 드러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어떤거냐?’ 해서 공모를 해서 조형물을 설치했습니다. 이준 열사 묘소를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준 열사 묘 뒤에다 이준 열사 흉상을 조형물로 설치를 했는데 ‘누가 봐도 저 분이 이준 열사!’ 이렇게 말씀들을 하셔요. 저희들이 외롭게 외국에서, 중국에서 그 이역만리(異域萬里) 투쟁할 때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한국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인데, 그래서 저희가 공모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작품들을 받아서 위원회를 만들고, 그래서 저 모습이 광복군 선열들이 했던, 그때 복장, 그때 총, 그때 깃발 이런 부분들을 다 고증을 해서 이렇게 뒤에 조형물을 설치했습니다. 사람들이 오시면 우리 광복군이 저런 총 가지고 저렇게 옷을 입고 싸움을 했구나. 독립전쟁을 했구나. 이렇게 느끼시도록 했는데, (광복군 전사상) 밑에 보면 철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부분들이, 많은 심사위원들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철이 굉장히 오래 가면 갈수록 훨씬 더 고풍스럽고 그때 생각을 훨씬 더 떠올리게 하는 그런 소재라고 말씀들을 하시고 평가들을 하셔서, (밑은) 철로 (윗부분은) 동으로 하면서 (광복군 전사상) 이 작품이 탄생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왜 저 작품이 저렇게 있는가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렸습니다.” (영상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후사리 예당호 출렁다리···국내 최장 출렁다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후사리 ‘예당호 출렁다리’는 2017년 6월 23일 착공해 2018년 12월 10일 완공했다. 길이 402m, 보도폭 1.8m, 주탑높이 64m로, 국내에서 호수 위에 설치된 가장 길고 높은 주탑 출렁다리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 성인 3,150명이 동시에 통행할 수 있으며, 초속 35m의 강풍과 규모 7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시공됐으며 야간경관조명이 특징이다. 주변시설은 전망데크, 인공폭포, 벽천수로, 야외공연장, 황새 알·둥지 조형물 등 문화광장과 수변산책로 188m, 부잔교(푼툰다리) 131m, 느린호수길 5.2km, 음악분수대(2020년부터 가동) 등이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베트남 호치민 전쟁기념박물관(War Remnants Museum)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베트남 호치민 전쟁기념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정보부 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원래 중국 및 미국 전쟁 범죄 박물관이었으나 많은 외국 관광객으로 인해 개칭했다. 박물관에는 전쟁에 사용됐던 탱크, 전투기, 미사일뿐만 아니라 미국이 사용한 고엽제 등으로 태어난 기형아들의 사체, 무고한 희생자들의 사진 등 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스마트폰 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기고] 5월의 6.25 전쟁영웅 조관묵 경감을 추모하며
조관묵 경감은 1927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경찰에 임용되었다. 6·25전쟁 당시 양구전방은 백석산지구전투, 양구 동북방 피의능선 전투 등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조관묵 경감은 춘천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대원 30여명과 함께 양구지역 치안 업무를 수행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과 동시에 춘천이 수복되자 조관묵 경감은 인민군 제10사단 소속 1개 연대 4천 여 명 규모의 패잔병과 대치하며 양구군 소재지를 사수하던 중, 11월 4일 패잔병의 습격을 받아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리까지 후퇴하였다. 다시 반격을 시도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양구-춘천간 도로를 우회 차단한 적의 배면 공격으로 소대와 중대가 통신이 두절되어 적의 맹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 경감은 2천 여 명의 양구 시민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소개시키는 등 최후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적의 총탄에 전사하였다. 조관묵 경감과 양구 파견대의 활약은 국군이 반격해 북진하던 시기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2천 여 명의 시민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경찰의 귀감이 되었다. 정부는 조관묵 경감의 공훈을 기려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반복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맞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6.25 전쟁영웅들의 고귀한 위국헌신의 정신은 오늘날 자신의 안위와 이익에 급급한 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본보기라는 점에서 이들의 값진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다가오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서 조관묵 경감이 보여준 용맹함과 위국헌신의 정신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새겨볼 수 있는 5월이 되었으면 한다.
-
[기고] 경기 양평군 의회 박현일의원
한반도에서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B.C 3세기 말∼B.C 2세기 초로 알려져 있다. 대륙에서 철기문화가 전래되면서 성읍국가(城邑國家)가 형태의 정치세력 집단이 점차 교환이나 외부의 적에 대한 공동방어를 목적으로 ‘연맹체’를 이루었으며, 이것이 ‘소국’으로 발전되어 하나의 국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양평을 비롯한 한강유역에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인 B.C 4세기경 성읍국가 형태의 진국(辰國)이 성립되어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으나 B.C 2세기 말 위만조선과 중국 한(漢)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위만조선 유민집단에 진국으로 대거 유입하면서 철기문화를 중심으로 한강유역에는 마한연맹체에 속한 10여개의 ‘소국’이 성립되었다. 이때 양평에는 일화국(日華國)이 존재했으며, 이후 하남위례성을 거점으로 한 백제에 편입된다. 그런데 한반도 최초의 철기유적이 양서면 대심리 주거유적에서 발견되어 양평이 철의 주산지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양평과 인근 가평읍 마장리에서 발견된 철기유적은 철 주산지로써 한강유역의 최초 국가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양평에 철을 생산ㆍ가공한 역사기록은 없을까? 문헌상에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말 정부가 필요로 하는 ‘탄환’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철장(鐵場)이다. 고려사(권56, 지10, 지리1)에 공양왕 3년(1391)에 지평현 경계에 철장을 설치하고 감무를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권148, 지평현편)에는 ‘지평현에 철이 많지 않으므로 철장을 폐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철의 주산지 혹은 무기제련소로서 역할과 기능은 이후 다시 부여된다. 조선 초기인 문종 실록(권3, 원년9월19일)에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는 무기제조소이자 철의 산지로서 중앙정부가 양근지역을 크게 의식하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던 1601년(선조 34년)에 도체찰사 한음 이덕형은 ‘양근에 주조해 놓은 여러 가지 철환(포탄)이 수십만개가 있는데 차차 수송해서 긴급한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소서’하면서 국가방위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선조실록 권135, 34년3월18일) 양근ㆍ지평일대가 철의 산지이자 철환이 제조되었던 장소였음은 18세기 이후에도 확인된다. 즉 1716년(숙종 42)에 민진형이 말하기를 ‘무기공급이 매우 어렵습니다. 지평의 둔전안에도 철맥이 있으니…’ 라는 기록이 숙종실록(권58, 42년 12월1일)에 보인다. 양평에서 철이 생산된 곳은 어디였을까.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옛 지평지역인 지제면 옥현2리 갈골이라고 하며, 지금도 철 찌꺼기가 발견되고 있다. 현재 지제면 옥현2리 19번지 일원에서 확인된 야철지는 옥현리 광양마을 서낭당 골짜기에 형성된 계단식 경작지 중간부분으로 해발 396m의 배미산 남쪽 산록으로 철재가 수북히 쌓여 있다. 주민들은 이곳에 병기창이 있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 곳은 옥현리 산 28번지 야산으로 광양저수지 남쪽에 있는 포장도로를 따라 망미리쪽으로 넘어가는 옛길 고개마루 못미쳐서 소나무숲 가운데 철재무더기가 쌓여 있다. 주민들은 이곳에 조선시대 주전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양평지역 철기유적은 철기시대부터 최소한 조선 숙종(1716)때까지 2000년 이상 지속된 야철유적인 만큼 역사적인 사료가치와 보전이 절실하다는 각계의 지적이다. 분명한 것은 철기시대이후 18세기까지 약 2000년동안 양평지역이 한반도 철 주산지였으며, 무기 제작소 였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19일 양평군은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의 소득 증대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역화폐 양평통보를 발행했다. 양평통보가 발행되기 600년전 조선시대 초기 조선통보가 양근지방에서 발행됐다면 역사의 기이한 인연인가? 양평에 중앙정부의 화폐를 제작했던 주전소(엽전제작소)가 설치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전기 이전부터 가동중이었음은 확실하다. 조선시대에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 중앙의 관련 부서 또는 지방의 감영등에 임시로 설치한 관청이 주전소(鑄錢所)이다.그러나 상설 관청이 아니고 수시로 설치, 폐지되었고 그 연혁이나 직제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세종 초 경기도 양근에 주전소를 설치,조선통보를 제작하였으나 원재료와 주전 인력의 확보가 어려워 나중에 폐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평읍 옥천면 용천3리 편전마을로 추정된다. 원재료인 구리와 철 공급이 원할치 않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442년(세종6) 당시 ‘양근군에 일찌기 주전소를 설치하고 대호군을 시켜 감독하게 하였다’라는 세종실록(6권 23ㆍ6년 2월 26일)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기록에는 주전소 규모도 예측할 수 있다. ‘양근 분서에는 주전하는 공인이 30명이나 이제 30명을 더 보강하고, 조역하는 사람도 더 늘려야 하며… 나무와 숲이 많은 곳에 대장간 50곳을 설치하여 공인 50명과 조역 100명을 주고, 감독하는 관원을 보강 배치 토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양근군이 중앙과의 거리상의 이유 때문인지 주전소에 소속된 인원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기고] 봄철 부주의 화재를 예방하자!
봄은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야외 활동 증가와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특성 때문에 부주의에 의한 화재가 사계절 중 가장 많이 발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소방조직에 있어 이 시기는 조금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봄철 기간 동안 전국 소방서에서는 봄철 소방안전대책과 더불어 산불예방대책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봄철은 화재로부터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도 전국 소방관서에서 봄철 화재예방대책 기간을 맞아 산불예방캠페인, 소방안전 현장멘토링, 유형별 소방안전교육, 이동체험교육 등 시민이 참여하여 함께 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듯 불조심 관련 많은 행사가 개최되고 있지만 부주의로 인한 화재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5년간 봄철 화재의 주요 발생원인 1위가 부주의에 의한 화재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예방을 위한 방법은 어렵지 않으며 조금의 관심과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첫째, 논ㆍ밭두렁과 같은 쓰레기 소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논ㆍ밭두렁을 태우는 경우 바람 등에 의해 산불로 확대되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발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ㆍ밭두렁 태우기는 해충 방제 효과보다는 이로운 곤충들이 더 사라져 역효과가 발생한다고 하니 명심해야 한다. 둘째, 산에 오를 때는 당연히 금연해야 한다. 또한 불법취사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무심코 버린 담배 꽁초나 불법 취사 행위로 인한 불씨들이 큰 산불이 돼 큰 재산피해뿐 아니라 인명피해까지 불러와 우리에게 되돌릴 수 없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셋째, 아이들의 불장난을 예방하기 위해 성냥이나 라이터 등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은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고 아이들에게 “불”에 대한 위험성을 교육해줘야 한다. 내 주변에 불이 나기 전까지 항상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화재가 발생하면 뒤늦은 후회만 남게 된다. 작은 관심의 시작이 우리 가족을 지킴은 물론 시민 안전문화 확산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따뜻한 날씨에 가족과 함께 하는 나들이도 좋지만 부주의 화재가 잦은 봄철을 맞아 주변을 점검하고 대처하는 모습이 익숙해지도록 우리 모두가 나설 차례다.
-
[영상] 단주 유림 선생 아나키즘에 대해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보통 아나키즘(anarchism)하면 무정부주의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일제 때 부당한 정치권력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무정부주의’라고 통칭 불리게 됐죠. 사실은 무정부주의 보다는 ‘반강권주의’ 내지는 ‘자율정부주의’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1946년도 4월 달에 (경남 함양군) 안의에서 한반도인 아나키스트가 다 모여서 무정부주의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통칭이냐? 할 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율정부다. 즉 인민대중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스스로 자율적인 권력을 만들자 이런 의미에서 자율정부주의라고 정의를 내렸죠.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아나키즘하면 무정부주의라고 알고 있잖아요? 부정부주의가 아니고 ‘자율정부’ 내지는 ‘반강권주의’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본다면 자주인 사상이라고도 되겠습니다. 1972년도에 해방 직후에 활동했던 아나키스트들이 서울 진관사에서 모여가지고 아나키즘을 또 다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반 대중한테. 그래서 ‘자주인’이라는 말을 썼어요. ‘스스로 자율적인 또 자주적인 사고를 가지고 남을 지배하지 않고 또 지배받지도 않는다.’ 그런 사상을 전개하는 사람을 ‘자주인’이라고 할 때, 이 ‘자주인’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나키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보통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무정부주의에 대신하는 말로 ‘자주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주인’에 대한 것은 ‘자율정부주의’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지만 우리가 1946년도에 해방 직후 아나키스트는 자율정부라고 했지만, 1972년도에 우리 아나키스트는 우리는 ‘자주인’으로 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러면 좀 복잡해지겠죠.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가 아니고 자율정부주의자 내지는 자주인을 생각하는 ‘자주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는데, 보통 지방자치라든지 아니면 풀뿌리 민주주의라든지 또 억압적인 정치사상을 개선하는 인권이라든지 또 환경문제라든지 이런 측면에서 아나키즘이 여러 사상과 연대하는 또 한국에서는 아까 말했던 민주공화정의 기원도 단주 선생이 ‘당파 합동연이(黨派 合同聯異)라고 말했죠? 그게 뭐냐면? ’각 정당이 또 내지는 이념이 상이한 이념을 버리지 않고 각자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민주공화주의를 실현하자‘ 이런 건데 민주공화정에도 우리 아나키즘이 접목될 수 있는 부문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해서 유림 선생이 참여했던 것도 바로 그런 겁니다. ’정부 공대균담(政府 共戴均擔)하고 당파 합동연이(黨派 合同聯異)하자‘ 즉 당파가 각자 이념을 버리지 않고 그 당파의 장점을 가져와 최대공약수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정부를 같이 균형 잡힌 정부를 구성하자 그래서 ’정부 공대균담(政府 共戴均擔) 당파 합동연이(黨派 合同聯異)‘ 이렇게 말을 했죠. 즉 우리가 민주공화정의 배경 이념으로서도 아나키즘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단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자주인 사상‘ 내지는 ’자율정부주의사상‘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반강권주의‘ 또 ’인류 보편의 인권‘을 가장 중요시하는 그런 이념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영상취재·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베트남 구찌 터널(Cu Chi Tunnel)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구찌 터널(Cu Chi Tunnel)은 베트남 호찌민시(사이공)에서 북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터널이다. 원래 프랑스 식민 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1948년부터 지하 1층 규모의 터널 형식의 땅굴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그 길이가 무려 250km에 달한다. 지금은 120km 정도만 남아 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일명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치른 내전이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해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쟁은 결국, 1975년 4월 30일 공산주의 월맹(베트남민주공화국+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후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베트콩)이 꾸찌 지역을 게릴라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기지로 사용해 미국과 남베트남의 군사 시설을 공격했다. 한편, 미군은 융단 폭격과 고엽제 살포로 이 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터널은 지상에서 3~4m의 두께를 유지하고, 50톤의 탱크와 폭격에도 끄떡없게 설계되어 있다. 터널의 넓이와 높이는 80cm로 체형이 큰 미군들이 들어갈 수 없었고, 출입구도 위장되어 있어 발견하기 어렵다. 터널 내부에는 회의실, 부엌, 식당, 침실, 치료실, 학교,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산소까지 설치되어 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점을 고려해 환기 시설도 갖추었다. 현재 구찌 터널 중 벤딘과 벤즈억 동굴 등 약 20km에 해당하는 일부 지역이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다. 좁은 입구를 확장했고, 내부를 한눈에 식별할 수 있게 곳곳에 상황판과 비디오를 상영한다. 또한 실탄 사격장이 있어 소총 사격도 할 수 있다(자료참조 : ENJOY 베트남, 위키백과). [스마트폰 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베트남 메콩강투어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메콩강(Mekong River)은 유역면적 81만㎢, 총길이 약 4,350㎞이다. 중국 칭하이 성 티베트 고원의 해발 4,900m가 넘는 곳이 발원지이며 현지에서는 팜(Pam) 강 또는 지추(Dzi Chu) 강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발원한 메콩 강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흘러 메콩 델타를 통해 남중국해로 흘러든다. 강 하구에는 9개의 지류로 나눠지는데 이를 구룡(九龍)이라고 부른다. 델타 지역은 약 5만㎢에 달하는 광대한 습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벼농사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최근 들어 물 위에서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섬, 정글, 동굴 등을 구경하기 위한 여행자들의 메콩 강 크루즈가 인기 있는 관광 상품이다(참조자료 : 다음백과, ENJOY 베트남). [스마트폰 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