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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8월의 현충인물, 김옥련·부춘화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8월의 현충인물로 ‘김옥련·부춘화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옥련·부춘화 애국지사’는 1930년대 일제의 강력한 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꽃처럼 타올랐던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운동이자 여성운동이며,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인 '제주 해녀 항일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김옥련 애국지사는 1932년 1월 해녀 1천여 명이 참가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907년 제주 구좌 하도리에서 가난한 집안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 탓에 낮에는 물질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노동독본·산술·글쓰기 등을 배우며, 일제의 부당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항일 의식을 키웠다. 김옥련 애국지사는 일제의 착취를 저지하고 해녀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항일단체인 ‘소녀회’의 회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부춘화 애국지사는 1932년 1월 해녀 1천여 명이 참가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908년 제주 구좌 하도리에서 빈곤한 집 장녀로 태어나 15살 때부터 생계를 위해 물질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며 역사적·시대적 상황과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부춘화 애국지사는 일제의 착취를 저지하기 위해 해녀들을 단결시키는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항일단체인 부녀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8년 제주 해녀조합 산하 구좌 해녀조합의 대표로 활동했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는 정치적 주권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침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해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할 제주도 해녀조합이 철저히 어용화되었고,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 1931년 여름 참다못한 구좌 하도리 해녀들의 거센 저항이 도화선이 되어 대규모 항일투쟁인 제주 해녀 항일운동이 분연히 일어섰다. 1932년 1월 7일 세화 장날을 이용해 김옥련·부춘화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 행위를 규탄하는 항일운동이 열렸고, 12일에는 1천여 명의 해녀들이 다구치 제주도사 일행을 향해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일본 관리와의 담판 요구 조건을 관철시킨 두 분의 애국지사는 이 사건으로 시작된 일경의 대대적인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체포되어 수개월간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두 분의 공훈을 기려 김옥련 독립유공자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고, 부춘화 독립유공자에게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김옥련·부춘화 독립유공자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잠들어 계신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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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8월 호국인물, 김홍일(金弘壹) 육군 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8월 호국인물로 ‘김홍일(金弘壹) 육군 중장’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30일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김홍일 육군중장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계몽주의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오산학교 졸업 후,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지만, 오산학교 출신자들이 항일운동 혐의로 탄압을 당하자 이를 계기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다. 1920년, 구이저우[貴州]군 소위로 임관 후 무장투쟁이 치열하던 연해주 대한의용군사회에서 근무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소령이 된 후, 1927년 용담(龍潭)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1931년에는 상하이 병기창 주임으로서 이봉창·윤봉길에게 폭탄을 제공해 임시정부의 의열 투쟁을 지원했다. 1938년, 중일전쟁 만가령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외국인으로서 드물게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권유로, 1945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여 광복군의 육성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육군준장으로 특별 임관하였고, 이듬해 소장으로 진급했다. 6·25전쟁이 발발 당시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그는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 북방에서 분산 철수하는 국군 부대를 수습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의 지휘를 통해 국군은 한강에서 6일 동안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첫 지상군을 한반도에 파견하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했다. 7월 4일에는 제1군단장에 취임하여 중부전선의 지연전과 낙동강선 방어 작전을 지휘했다. 이후 육군종합학교장으로서 초급간부 양성에 전념하던 그는 1951년 3월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리고 대만대사,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 광복회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80년 8월 8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군인으로서 그의 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을, 독립운동 유공으로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그가 타계한 직후인 1980년 8월 11일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로를 드높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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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7월의 현충인물, 박재권·남궁선·김기봉 이등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7월의 현충인물로 ‘박재권·남궁선·김기봉 이등중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7월의 현충인물은 70여 년 전 위기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박재권·남궁선·김기봉 이등중사’로, 세 분의 용사들은 남북공동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DMZ에 위치한 화살머리고지에서 유해가 발굴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화살머리고지는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수많은 호국용사가 잠들어 있다. 유해발굴사업은 6·25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수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 홀로 남겨진 12만 3천여 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국가적 숭고한 호국보훈사업」이다. 박재권 이등중사는 1931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1952년 3월 입대해 국군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강원 김화 저격능선 전투, 철원지구 전투 등에서 전투를 치른 박 이등중사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고지 사수 하루 전인 1953년 7월 10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남궁선 이등중사는 193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1952년 4월 입대하여 국군 제2사단 32연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남 이등중사는 소총수로 철원 상석지구 전투에 참전하였고, 1953년 7월 9일 화살머리고지를 향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교전 중 105mm 포탄을 맞아 산화했다. 김기봉 이등중사는 1925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951년 12월 당시 27살의 나이로 국군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김 이등중사는 1953년 6월 29일부터 중공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화살머리고지 공방전 중 1953년 7월 10월 전사했다. 고인을 직접 발굴한 DMZ 발굴팀장은 입안에 물고 계셨던 철제 계급장이 마치 “나를 반드시 알려 달라”는 일종의 메시지같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박재권 이등중사는 2019년 3월 26일, 남궁선 이등중사는 2019년 9월 18일, 김기봉 이등중사는 2019년 11월 7일 각각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안장식을 거행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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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7월 호국인물, 고길훈 해병 소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7월 호국인물로 ‘고길훈 해병 소장’을 선정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고길훈(1922.7.10.~1981.2.14.) 해병 소장은 1922년 7월 10일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다. 1944년 도쿄 메이지[明治]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5월 11일 해군에 입대하였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에 참여하여 초기 해병대의 체제정립에 크게 기여한 그는, 9월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해병대는 전쟁 발발 이전까지 지리산 및 제주도에서 치안유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호남지역까지 남하했다. 같은 해 7월 15일 해군본부는 호남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대기하던 해병 3백여 명을 ‘고길훈 부대’로 명명하고 고길훈 소령에게 지휘를 맡겼다. ‘고길훈 부대’는 군산지역에 상륙하여 불과 3백여 명의 병력으로 3일 동안 군산 일대를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군산항에 적재된 정부의 재산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여 연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병학교장·제1해병연대 부연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휴전 후에는 제1여단장과 제1상륙사단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3년 12월 해병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81년 2월 14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고(故) 고길훈 해병 소장은 해병대의 첫 전투인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으며, 6·25전쟁 기간 동안 주요 전투의 승리에 기여하면서 해병대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52년과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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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6월의 현충인물,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6월의 현충인물로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를 선정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국립대전현충원 6월의 현충인물은 구월산 유격부대의 대장과 여대장인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로 우리 역사에서 국난 때마다 등장한 의병의 전통을 이은 ‘6·25 의병’이다. 김종벽 유격대장은 1914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김 대장은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으로 6·25전쟁 당시 빈약한 무기로 구월산의 공비와 연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고향 청년들을 보고 1950년 12월 7일 반공청년들을 규합해 연풍부대를 창설했다. 구월산 유격부대의 전신인 연풍부대는 현역장교인 김종벽 소령이 지휘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민간인을 훈련시켜 적을 교란하고 적진에 침투시키는 등 정규군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이후 연풍부대는 부대정비와 인근도서 등 각 지역의 청년들을 규합하고 수월부대, 백마부대 등을 흡수해 구월산 유격대로 성장했다. 이정숙 유격대원은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하무장대를 조직해 농민군을 진두지휘하며 북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구월산 유격대로 합류한 이 대원은 재령유격부대가 적에게 포위되자 촌부로 가장해 100여 리를 밤새 걸어 적의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등 많은 전공으로 ‘구월산의 여장군’으로 불렸다. 여자 유격대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정숙 유격대원의 활약상은 196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그려져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조국을 지켜낸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각각 충무무공훈장을 추서(2012년 김종벽, 2015년 이정숙 국가유공자)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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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6월 호국인물, 조달진 육군 소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6월 호국인물로 ‘조달진 육군 소위’를 선정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조달진(1928.11.18.~2008.10.15.) 육군 소위는 1928년 11월 18일 전라남도 승주군(現 순천시)에서 태어났다. 1949년 8월 입대해 제6사단 제19연대 제3대대에서 근무했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인 1950년 6월 28일, 홍천지구 말고개 전투에 참전하여 북한군의 자주포 대열에 매복을 가하여 적 자주포 10량을 파괴하는 대전과를 세웠다. 또 전쟁 초기 북한군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아군의 사기를 높였을 뿐 아니라 6월 30일까지 홍천을 사수해 적의 남침을 3일간 지연하는데 기여했다. 이때의 전공으로 2계급이 특진되었다. 이후에도 1950년 7월 25일, 경상북도 상주군 유곡전투에서 특공대 7명과 함께 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등의 큰 공을 세워 ‘불사조’,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위험천만한 공격을 두 번이나 연이어 성공시킨 그는 한 달 만에 이등상사로 진급한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제19연대 수색중대의 선임하사로 근무하며 최전선을 지키다가 휴전 이후인 1955년 2월, 소위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2008년 10월 15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故 조달진 소위는 1950년 을지무공훈장,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 타계 이후인 2011년에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한국군 최초로 미국 동성무공훈장(Bronze Star)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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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5월의 현충인물, 정요한 의사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5월의 현충인물로 ‘정요한 의사자’를 선정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정요한 의사자는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부에 진학할 정도로 거의 모든 운동에 탁월한 신체능력과 강한 정신력을 지닌 건실한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자원봉사 활동으로 따뜻함을 나누고 참사랑을 실천하던 착실한 청년이기도 했다. 2009년 12월 27일 정요한 의사자는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자동차로 3시간을 달리고도 또다시 2시간을 걸어야 하는 오지인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보르네오섬의 원주민 마을로 서현교회(서울 소재) 청년 18명과 함께 자원봉사를 떠났다. 그는 다음날 28일부터 4박 5일 동안 밀림의 원주민 마을 2곳에서 의료봉사와 이·미용봉사, 어린이 봉사 등의 궂은 일도 마다않고 값진 땀을 흘리며 나눔을 실천했다. 그리고 귀국을 앞둔 2010년 1월 2일 말레이시아 쿠칭시 한 해변에서 갑자기 밀어닥친 강한 파도에 휩쓸린 위급한 한국여성 3명을 고(故) 김성현(연세대학교 재학)군과 함께 혼신의 노력으로 구조한 후 정작 두 명의 의인들은 빠른 조류에 휩쓸려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는 안타까운 이별을 했다. 정부는 2010년 제3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살신성인의 용기와 행동을 몸소 실천한 정요한 군을 의사자로 인정했다. 의사자란 직무 외의 행위로서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을 말한다. 구조행위는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말한다. 자신을 희생해 인류애를 실천한 정요한 의사자의 의로운 용기는 우리 사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온전히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알게 해준 아름다운 청년 정요한 의사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의롭고 숭고한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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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5월 호국인물, 한신 육군 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5월 호국인물로 ‘ 한신 육군 대장’을 선정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한신(1922.12.27.~1996.5.6.) 육군대장은 1922년 12월 27일 함경남도 영흥(永興)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1944년 병(兵)으로 입대, 간부후보생이 되어 견습사관(見習士官)중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6년 월남 후, 국방경비 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서 안강·기계전투, 38선 북진작전, 대관령전투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낙동강 최후방어선의 요충지였던 안강·기계지역에서는 철수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여 북한군 12사단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국군의 방어선 유지와 반격작전 여건 조성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 또한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한창이던 1951년 5월 22일, 동해안의 전략적 요지인 대관령전투에서 2일간 처절한 사투 끝에 1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수도사단장, 6군단장, 1군사령관, 합참의장 등의 주요 직위를 역임하였다. 특히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잘 재우는’ 사병복지의 구현과 이를 통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군의 기강확립과 강군 육성에 헌신했다. 그리고 합참의장 재직 시에는 국군 현대화 계획을 입안하여 자주국방의 기틀을 세우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나라와 군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청렴결백의 표상과 국군의 사표(師表)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1996년 5월 6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며, 서울 국립 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과 헌신을 기려 1953년 8월 27일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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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4월의 현충인물, 김성권·강혜원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4월의 현충인물로 ‘김성권·강혜원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성권·강혜원 애국지사는 먼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일제가 조국의 국권을 침해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어 항일운동에 앞장선 부부 독립운동가다. 김성권 선생은 1875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이민해 미주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하와이 에와(ewa) 농장에 배치된 선생은 에와친목회를 결성하고 친목회보 주필과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는 등 미국 내 한인들을 결속하고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선생은 안창호 선생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09년에는 미주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국민회를 탄생시켰고, 1913년에 대한인국민회에 독립 의연금을 출연했으며,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이사장과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집행위원장 겸 기관지 「독립」신문사의 사장으로 활동하며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희생과 헌신으로 민족운동에 힘썼다. 강혜원 선생은 1885년 평양에서 태어나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했다. 1913년 평생의 동반자이자 영원한 독립운동 동지인 김성권 선생과 결혼한 뒤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방으로 이주하여 강원신 선생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하며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신한부인회를 결성하고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적극 후원했다. 같은 해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지원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1940년에 다시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을 맡은 강혜원 선생은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조국을 위해 헌신하셨다. 정부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김성권 지사에게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강혜원 지사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미국 내 한인 결속에 힘쓰고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기를 희망하던 김성권 지사는 1960년에, 강혜원 지사는 1982년에 별세하여 미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11월 유해봉환을 통해 그리워했던 고국의 품인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드셨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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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4월 호국인물, 나창준 공군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4월 호국인물로 ‘나창준 공군 소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나창준 공군 소령은 192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1944년 3월 일본 다치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9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이듬해 10월 공군 창설과 함께 L-4연락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연락기를 몰고 전·후방 정찰임무와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6월 28일에는 동료 조종사 3명과 함께 여의도비행장에서 미처 철수하지 못한 미군사고문단 소속 L-5 연락기 2대를 적의 대공포 사격을 뚫고 수원기지로 무사히 귀환시켰다. 1950년 10월 소위로 현지 임관한 후 1951년 3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같은해 8월 F-51D 무스탕 전투기 기종 전환훈련을 받은 후 제1전투비행단 강릉전진기지에 배속되었다. 이후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작전에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원산, 평양 등 적 후방 지역 깊숙이 출격하여 수많은 적 전차와 진지 그리고 보급품 집적소와 군수공장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2년 4월 5일 그는 평양 남쪽 진남포 지역의 적 보급로 차단과 군수공장 폭격 명령을 받고 4대의 F-51D 무스탕 전투기 편대를 이끌고 강릉기지에서 출격했다. 철교와 군사시설을 폭파한 후 진남포 군수품 생산공장을 공격했으나 적의 대공포에 피탄되었다. 그는 항공기가 비행불능 상태에 처하자 적 진지로 돌진, 자폭함으로써 25세의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고(故) 나창준 소령은 6·25전쟁 기간 중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로 총 57회의 출격을 기록했다. 그 결과 지리산지역 공비소탕작전과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등 전쟁 중 우리 공군의 주요 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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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3월의 현충인물, 이신애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3월의 현충인물로 ‘이신애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이신애 애국지사는 1891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진학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과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이신애 선생은 1914년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편을 잡고 여성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 무렵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혈성부인회에 가담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과 강우규 선생의 부탁으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는 한편 서울로 들어온 강우규 선생을 은닉시키는 것은 물론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데 힘썼다. 이신애 선생은 강우규 선생이 서울로 오기 전인 1919년 9월 초, 조선민족대동단 부인단총대에 선출되어 여성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신애 선생을 본 이종춘 선생은 “저토록 젊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투쟁한다면 우리도 독립할 수 있으리라”라는 확신으로 조직에 참여했다. 1919년 10월 초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직의 본부를 상해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 이강 공(李堈 公)의 상해 망명과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때 이신애 선생은 여성 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일경에 체포되며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붕괴되어 만세운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다시 만세운동을 준비한 이신애 선생 등은 11월 28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광장에서 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에 일경은 만세운동 확산을 우려해 이신애 선생을 포함해 독립운동가들을 신속히 체포했다. 체포된 이신애 선생은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투옥 중에 3·1운동 1주년이 되자 유관순 열사와 옥중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부인회’를 조직, 부녀 계몽운동에 투신하셨다. 정부에서는 평생을 조국에 헌신한 이신애 애국지사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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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3월 호국인물, 박노규 육군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3월 호국인물로 ‘박노규 육군준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박노규 육군준장은 1918년 3월 14일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에서 출생했다. 1946년 국방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하여 같은 해 11월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발발 전에는 제4연대 작전주임장교로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50년 7월 14일, 그는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서 소백산맥의 관문인 문경 이화령 일대를 방어했다. 연대는 이화령을 돌파하려는 북한군 제1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은 제2·3대대가 중과부적으로 진지를 이탈하자 그가 지휘하는 제1대대만이 방어진지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는 치열한 백병전으로 북한군을 격퇴하고, 이화령 북방의 연풍 일대까지 반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제1대대의 반격에 힘입어 연대는 이화령전투에서 8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여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 있었다. 또한 상주-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계획을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의 구축에도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11월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제2사단 제31연대장으로서 태백산지구 일대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태백산지구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과 함께 남파 유격대가 국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듬해 1951년 3월 4일, 영남 일대의 병참선을 경비하던 제31연대는 일월산지구를 돌파하려는 북한군 1,500여 명의 기습을 받았다. 이때 그는 연대장의 직책으로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적의 공격을 격멸하던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전공과 헌신을 기려 1951년 4월 27일 준장으로의 특진과 함께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2호)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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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2월의 현충인물, 김동빈 장군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2월의 현충인물로 ‘김동빈 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동빈 장군은 1923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만주의 용정중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1기로 군에 입문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김동빈 장군은 11연대장으로서 과감한 지휘와 벼랑 끝 전술을 내세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부동전투, 영천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1950년 8월 3일 해평리 작전에서는 북한군의 2개 사단 절반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공을 인정받아 1953년에 군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67년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끝으로 예비역 중장으로 편입된 김동빈 장군은 대한준설공사(현 한진중공업) 초대사장으로 임명되어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모든 순간을 안고 있었던 김동빈 장군은 2002년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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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2월 호국인물, 천춘식 해병 이등병조(현 하사)
【중앙보훈방송=구용환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2월 호국인물로 6·25전쟁 당시 안동지구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천춘식 해병 이등병조(현 하사)’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천춘식 해병 이등병조는 1929년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났다. 1949년 7월 해군 14기로 입대하여 해군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도중에 새롭게 창설된 해병대로 편입되어 해병대 2기생으로 훈련받았다. 1951년 1월 26일 천 이등병조는 해병 독립 5대대 소속 분대장으로 안동-영덕 인근 산악지역의 북한군 게릴라 소탕 작전에 참여하여 후방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가 한강 이남지역을 넘어서자 남한지역에 흩어졌던 북한군 패잔병이 집결하여 후방 지역의 시설과 도로를 위협했다. 해병 독립 5대대는 1월 26일 안동에서 수색정찰을 시작하여 2월 2일 의성군 옥산면 일대에서 적 250여 명을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했다. 포위된 적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천 이등병조는 소대의 선두에서 분대를 지휘하여 3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11명을 생포하는 등 큰 타격을 입혔다. 해병 독립 제5대대는 2월 12일까지 후방 안정화 작전을 마치고, 같은 달 16일 김포지역에 배치되어 게릴라 소탕 작전과 전방 개풍지역의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등병조는 4월 25일 개풍지역에서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었다. 천 이등병조는 분대장의 직책으로 저항하는 적에 맞서 선두에서 공격을 지휘하는 군인정신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2년 12월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구용환 기자 khy5000@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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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1월 호국인물, 이일영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1월 호국인물로 ‘이일영 중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이일영 중위(추서 계급)는 1928년 8월 26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43년 3월 예안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5년 3월 구마가야(熊谷) 육군비행학교 조종과정을 졸업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육군 항공부대가 창설되자 같은 해 9월 입대하여 육군항공대에서 근무했다. 1949년 공군 창설과 함께 L-4 연락기 조종사로 근무하던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적진 정찰 및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며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기여했다. 특히 1950년 9월에는 경북 영천 하양동 일대에 잠복하고 있던 적군 200여 명의 위치 정보를 아군에게 전달하여 섬멸케 하였다. 이듬해 9월 F-51D 무스탕 전투기 기종 전환훈련을 받은 후 공군 소위로 현지 임관 한 그는 제1전투비행단 강릉전진기지에 배속되었다. 이후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작전에도 참여하여 동부전선 적 후방 지역의 보급 및 병력 수송 차단과 지리산지역 공비 소탕작전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1월 9일 그는 강원도 원산과 회양 지역의 적 대공포 진지 파괴와 보급로 차단의 명령을 받고 김두만 대위, 김금성 중위와 함께 강릉기지에서 출격했다. 적의 주 보급선인 경원선 철도를 폭격하고 대공포 진지를 공격했으나 회양 남쪽 창도리(昌道里) 지역에서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에 피탄되었다. 그는 항공기가 비행불능상태에 처하자 적 진지로 돌진, 자폭함으로써 25세의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고(故) 이일영 중위는 6·25전쟁 기간 중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로 총 44회의 출격을 기록했다. 그 결과 100여 개소의 철도와 도로 차단, 20여 개소의 대공포와 포진지 파괴, 적군 60여 명 사살 등의 전과를 올렸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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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12월 호국인물, 최병익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2월 호국인물로 ‘최병익 중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최병익 중위(1930.10.03.~1952.09.21.)는 1930년 10월 3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2년 5월 4일, 갑종간부후보생 제19기로 임관하여 중부전선의 제8사단 10연대 1대대 소대장에 보임되었다. 1952년 9월 21일 밤, 북한군은 포로교환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일대에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당시 제3중대 3소대장 최 소위(당시 계급)는 소대원들과 함께 705고지에서 적 2개 중대를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벌였다. 그러나 적의 파상공세가 계속되어 진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최 소위는 위급한 지역으로 나아가 직접 백병전을 수행하고 부하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소리쳐 알리며 소대의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최 소위는 적의 수류탄에 맞아 쓰러졌고, 소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소대원들은 전의를 다져 3시간 동안 이어진 혈투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이 날의 전투에서 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퇴각하였고, 아군은 적 사살 319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정부는 故 최 소위의 공적을 기려, 중위 특진과 함께 1952년 11월 15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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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11월 호국인물, 이광악 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1월 호국인물로 ‘이광악 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이광악(李光岳) 조선 장군(1557~1608)은 조선 중기의 장군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진지(鎭之)이다. 장군은 1557년(명종 12), 충북 충주 유동리에서 아버지 정선군수 이호약과 어머니 경주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크고 맑아서 대인의 풍모가 있었다. 학문과 수신에 힘쓰기보다는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것을 즐겨 무관으로 출사하는 데 그 뜻을 두었다. 1584년(선조 17) 무과 별시에서 을과 16위로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연일(延日)현감·이성(利城)현감·경주(慶州)판관을 거쳐 곤양(昆陽)군수에 임명되었다. 1592년 10월 초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제해권을 상실한 왜군은 남해안 지방의 거점 확보가 어려워지자 불리해진 전세 회복을 위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당시 곤양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광악 장군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령으로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적에 맞섰다. 왜군의 선봉이 진주성의 동쪽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부상을 입자 그를 대신하여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이때 돌진해 온 적장을 이광악 장군이 화살로 쏘아 죽이니 전의를 잃은 적군은 물러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퇴각하는 적을 물리쳐 크게 승리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전투에서 순국한 이복남을 대신하여 전라병사에 임명되어 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순천·광양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이어 순천 예교성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선봉군으로 활약하였다. 이광악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에 빛나는 진주성전투 승리의 주역으로서 그 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수원(水原)부사·경기방어사·영흥(永興)부사를 거쳐 1606년(선조 39)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장군은 1608년 52세 나이로 별세했으며, 1711년(숙종 37)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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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11월의 현충인물, 김해인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11월의 현충인물로 ‘김해인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해인 애국지사는 1918년 9월 22일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6년 3월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항일결사 조직 명랑클럽을 조직해 일어 사용 금지와 신사참배 거부, 악질 일본인과의 교유를 배척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에 앞장서는 한편, 무궁화 식수를 장려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양에도 힘을 쏟았다.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가려던 명랑클럽은 동료 천영관 선생이 일제의 패망을 언급한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며 비밀결사가 드러나 김해인 선생을 포함한 회원들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김해인 선생은 같은 해 9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해인 지사에게 독립을 향한 위대한 업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2006년 서거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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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10월 호국인물, 김영환 공군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0월 호국인물로 ‘김영환 공군준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의하면, 김영환 공군준장(1921.01.08.~1954.03.05.)은 1921년 1월 서울 서대문에서 출생했다. 광복 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 참위(현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는 국방경비대 중대장과 통위부 정보국장(대리)으로 근무하면서 공군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미 극동공군으로부터 F-51전투기를 인수하여 전투기 조종사로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후방지역 차단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휴전 시까지 중동부 전선의 적 전력을 타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1951년 8월,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해인사 폭격을 요청받았지만 끝내 폭격하지 않아 팔만대장경과 해인사의 숱한 국보급 문화재를 지키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2010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그의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서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작전을 지휘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 비행훈장과 미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의 영광과 명예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최초로 착용하여 이를 제도화시킨 주인공이다. 휴전 이후에도 전투비행단 운영체계 수립, 전투조종사 양성 등 공군 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으나 안타깝게도 1954년 3월 5일 임무 수행 중 악천후로 인해 34세 일기로 순직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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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10월의 현충인물, 조일문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10월의 현충인물로 ‘조일문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조일문 애국지사는 1917년 12월 17일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서 전방공작과 적 후방 공작활동을 펼치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신한 독립운동가다. 조일문 지사는 중국 난징 중앙대학 법상학원 정경과 재학 시 비밀결사 ‘한족동맹’을 조직하고 애국청년 규합과 일본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44년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펼치던 임정특파원 김병호가 일경에게 체포된 직후 난징 중앙대학 학생들에 대한 일경의 일대 검거가 시작되자 이일범 선생 등 10여 명과 함께 제3전구 지역인 무림으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이때 난징 주둔 일본군이 보관하던 기밀작전문서인 일본군 병력배치 상황, 연합군의 기습상륙 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계획, 중국 연해안탐측량, 군용지도, 기타 기밀문서 등을 대량 탈취하는 등 항일 작전수행에 크게 기여했다. 광복 이후 조일문 지사는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법정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을 거쳐 제8대 건국대 총장을 역임하고, 제12대 국회의원,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과 영남학원 이사장, 한중문화협회 이사장 그리고 독립기념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평생을 대한민국에 헌신하셨다. 선생의 교수 시절 ‘정당론’ 강의는 다른 대학 청강생까지 강의실에 넘칠 정도로 명강의로 통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정부는 조일문 지사에게 독립을 향한 위대한 업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16년 서거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