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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의 6․25전쟁영웅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
【중앙보훈방송=구용환 기자】 국가보훈처는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를 ‘2023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는 6‧25전쟁 당시, 통신선 단절로 연대의 철수 작전이 예하 대대에 전달되지 않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유선 통신 연결을 성공시키고 산화하였다.1927년 5월 4일 평안남도 평원군에 태어난 홍윤조 중위는 1953년 1월 육군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통신 가설 장교로 임명되었다. 6‧25전쟁의 정전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인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작전상 요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부 전선에 5개 군단을 투입, 최후 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아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최대한 저지하다 철수 명령이 하달되면 서로 엄호하면서 부대별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도처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던 중 제8사단 제16연대의 철수계획이 변경 지만, 예하 1대대는 통신선이 단절되어 철수계획을 전달받지 못해 고립 위기에 처했다. 이때 당시 소대장(소위)이었던 홍윤조 중위는 긴급가설 결사조를 편성, 대원 10명과 함께 끊어진 유선 통신선 복구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의 박격포탄이 터져 가슴과 대퇴부에 큰 부상을 입은 홍 중위는 생명이 위험한 가운데서도 “생명선을 연결하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산화했다. 소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조원들은 목숨을 걸고 무사히 철수작전을 완료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한 그에게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구용환 기자 kyh@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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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의 6·25 전쟁영웅,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 기지에서 주요 작전을 수행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를 ‘2022년 7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0일 보훈처에 따르면 이 부대는 6·25전쟁에서 부산 수영,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오산 비행장 등 최전방 기지에 배치되어 주요 작전을 수행했으며, 연 병력 826명이 참전하여 총 12,405회의 출격기록을 수립했다. 이를 통해 적군 전차 40여대와 야포 220여문, 대공포 147문, 보급품 보급소 500여 개소 등을 파괴 및 파손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함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에서 이를 지지, 제2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한민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고, 아프리카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병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용맹으로 ‘창공의 치타(Flying Cheetahs)’라는 별칭을 얻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는 1950년 9월 26일, 대대장 테론(S.V.B. Theron) 중령을 비롯한 206명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항을 떠나 1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에프(F)-51 무스탕 전투기 16대를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뒤, 11월 15일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한 제2전투비행대대는 실제 전투 임무를 개시한 1950년 11월 19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최전방 기지에서 지상군 근접지원, 적 보급로 차단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36명이 전사했고, 8명이 포로가 되는 희생을 겪기도 했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는 6·25전쟁 참전에 따른 공로로 대한민국 무공훈장 11개, 미국 은성훈장 2개를 비롯한 각종 훈장 1,109개, 유엔 훈장 797개 등을 수여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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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의 6·25 전쟁영웅, 최용덕 대한민국 공군 중장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6·25전쟁에서 활약한 ‘최용덕 대한민국 공군 중장’을 ‘2022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최용덕 공군 중장(1898.9.19.~1969.8.15.)은 6·25전쟁 당시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재직하며 김포기지 방어를 위해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적군과 대치하였으며, 이 외에도 항공기지사령관과 작전참모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제2대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여 휴전이 될 때까지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공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최용덕 중장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나 봉명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경술국치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 접했다.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중국군 초급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3·1운동 직후 중국군에서 나와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20년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한 최용덕 중장은 독립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중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복군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귀국해 공군 창설에 헌신했다. 1948년 창설된 육상경비대 항공사령관에 임명되어 항공 분야의 발전과 요원 양성에 이바지한데 이어, 국방차관으로 국군조직법을 초안해 공군 독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6·25전쟁 직전 공군사관학교장에 보임된 그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 경비와 북한군의 김포반도 상륙 저지에 나섰다. 1952년 12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서 동해안의 전략요충지인 351고지의 근접항공지원작전을 주도해 적의 위협을 제거하는 등 대한민국 공군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 여러 작전을 이끌었고, 1953년 3월 13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체신부 장관과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8월 15일 광복절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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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6·25 전쟁영웅, 송태호 대한민국 육군 하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6·25전쟁에서 결사대를 이끌고 아군 진지를 사수한 ‘송태호 대한민국 육군 하사’를 ‘2022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보훈처에 따르면 송태호 하사(1930.11.24.~1953.6.12.)는 6·25전쟁 당시 제1사단 제15연대 수색중대 제1소대에서 소총수로 복무하던 중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이 연천 북쪽 임진강 북안의 고양대 부근 니키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인해전술로 공격을 감행하자 결사대를 이끌면서 진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했다. 송태호 하사는 1951년 6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으며, 1952년 10월 1일 고양대 일대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중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추계공세의 개시와 함께 아군의 제15연대 방어선 정면에 포격을 시작한 뒤, 저녁 무렵 중공군 1개 대대가 송 하사가 소속된 수색중대 제1소대가 지키던 니키고지를 공격했다. 이에 송태호 하사를 비롯한 소대원들은 화력을 집중해 적을 저지하며 동굴호에 집결, 중공군을 진지로 끌어들여 진내사격으로 섬멸하고자 했다. 동굴 속에 엄폐한 소대가 진내사격을 요청했으나, 무선이 실패하자 부득이 결사대를 편성했다. 이후 송태호 하사 등 4명의 결사대가 수류탄을 던지며 동굴 입구로 돌진하던 순간, 중공군이 설치한 폭약(TNT,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화약)이 폭발하면서 흙더미에 파묻혔다. 잠시 후 의식을 차린 송태호 하사 등은 대검으로 흙더미를 파헤치고 빠져나와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곧이어 아군 중대가 역습을 가하여 적을 격퇴함으로써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송태호 하사는 이러한 공적으로 1952년 11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정전협정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53년 6월 12일 서부전선의 무명고지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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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의 6·25 전쟁영웅,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터키 공군 중위’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4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터키 공군 중위(Muzaffer Erodönmez, 1922.11.25.~1951.4.21.)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6・25전쟁 당시 미 제5공군 제729폭격대대에 배속되어 B-26 인베이더(Invader)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1년 4월 21일에 교량 파괴 임무를 받고 평안남도 순천군 북동쪽의 철도를 폭격하던 중 적의 대공포탄에 기체가 피격되어 전사하였다.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1922년 11월 25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 부르사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터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1943년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였고 1947년 중위로 진급하였다.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1950년 9월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여단의 일원이자 전방 항공통제 임무를 부여받은 2명의 공군 장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전방항공통제관으로 복무하면서 조종사로 참전하기를 원했는데, 1951년 1월 미 극동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미 제8군사령부에 배속됨과 동시에 제452폭격전대 예하 제729폭격대대에 배치되었다. 1951년 2월부터 B-26 인베이더(Invader) 폭격기를 조종한 그는 북한 중부와 동북부 지역 적군에 대한 맥아더사령관의 공격 명령에 따라 2월에 1회, 3월에 15회, 4월에 9회 출격하였다. 1951년 4월 21일 교량 파괴 임무를 받고 평안남도 순천군 북동쪽의 철도를 폭격하던 그는 적의 대공포탄에 기체가 피격되어 원창리 북쪽 3km 지점에 추락해 전사하였다.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이러한 공적으로 1951년 5월 미(美) 공군 수훈장(Air Medal)을 수여 받았고, 자국인 터키 외에서 전사한 터키 공군 최초의 조종사였다. 한편,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4월 1일(터키 현지 시각) 터키 수교 65주년을 기념하고 한국전 참전용사 위로・감사를 위해 현지를 방문하는 일정 중에,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학교(이스탄불 소재로 에르된메즈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의 명칭을 정함)를 방문하여 학교에 설치된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동상에 헌화·참배를 하고, ‘6·25 전쟁영웅 선정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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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의 6‧25 전쟁영웅, ‘강두형 육군 준장’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강두형 육군 준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강두형 육군 준장(1930.3.12.~1977.3.28.)은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15일,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 제2대대장으로 직접 증원소대를 지휘해 적의 공격을 무릅쓰고 최전방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저격능선 상 ‘A고지’를 탈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두형 준장은 1930년 3월 12일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하였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제7기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 국군 제2사단은 강원도 오성산 남쪽 중공군 전초인 저격능선을 공격하였다. 첫 공격에서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는 저격능선을 탈취했으나, 그날 밤 오성산 일대 적의 역습으로 5시간 만에 빼앗기게 되었다. 10월 15일에 제17연대 제2대대장인 강두형 소령(당시 계급)은 전날 중공군의 공격으로 빼앗긴 저격능선 상 ‘A고지’를 공격하여 재탈환하고 그날 밤 적군의 반격을 받아 8시간 밀집 방어를 시도했지만, 다시 빼앗겼다. 이에, 강두형 소령은 예비중대의 1개 소대를 차출해 반격에 나섰지만, 소대가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분산되고 소대장마저 부상을 입게 되자, 대대장인 강 소령이 직접 증원소대를 지휘해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최전방에서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그 과정에서 적의 소총과 포탄 및 박격포 포격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적군과 교전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강 소령의 몸을 아끼지 않는 지휘력과 용기에 힘입어 대대는 16일 새벽에 ‘A고지’를 결국 재탈환하였다. 강두형 준장은 이러한 저격능선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1953년 9월 미(美) 은성훈장을, 이에 앞서 6·25전쟁 중의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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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의 6·25 전쟁영웅, ‘여성의용군’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여성의용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여성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국방의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보상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호국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으로 참전했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입대하여 전투 활동을 비롯해 간호,
정훈, 심리전, 행정 및 전투 근무지원 등을
수행했으며, 군에 입대하지 않은 여성들은 학도의용군, 철도근속, 간호요원, 예술대원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먼저, 육군은 여성의용군 배출을 위해 1950년 9월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했는데, 이들은 국방부 및 육군본부를 비롯하여 여군훈련소, 전방 군단·사단 그리고 정훈대대, 정보 및 첩보부대, 예술대, 경리‧통신‧병기‧보급부대 등 전후방 각급 부대에 배치되어 전투
및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해병대 여군은 6‧25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에서 자원입대한 미혼 여교사와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진해 해군통제부와
부산의 해군본부에 배치되어 행정, 보급, 정비, 간호보조, 헌병, 정훈, 통신, 교환 등의 분야에서 전투지원 활동을 했다.
공군 여성항공병은 9‧28서울수복
이후 공군본부 참모부서에 배치되어 행정 보조업무를 수행했는데, 이후 전역을 선택한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기상대 및 통신대에서 계속 근무했다.
6‧25전쟁 이전부터 임관하여
간호업무를 수행해왔던 육군과 해군의 간호장교는 전쟁 발발 후에도 전장을 누비며 본연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아울러, 6‧25전쟁 중에는 군번 없는
여성들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약이 있었는데, 학도의용군, 민간
간호사, 유격대원, 그리고 군사활동을 지원한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전후방에서 간호활동, 행정지원, 유격활동, 첩보수집, 철도근무, 예술대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여성의용군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은 창설 72주년이 지난 우리
여군이 육‧해‧공군 및 해병대는
물론이고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해외파병 부대까지 배치되어 활동하는 등 자랑스럽고 막강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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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의 6‧25 전쟁영웅, ‘정락구’ 육군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정락구’ 육군 중위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정락구(1928.11.28.~1952.10.14.)
중위는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중국군 제38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강원도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 28연대 11중대 소대장으로 임무 수행 중에 적의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한 전쟁영웅이다.
정락구 중위는 1928년 11월 28일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했고, 6‧25전쟁 중인 1952년에 갑종장교 제12기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국군 제9사단 28연대 11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52년 10월 13일에 정 소대장(당시 계급은 소위)은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백마고지의 외곽 능선을 공격하던 중 진지 속에 엄폐한 적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 소대장은 먼저 앞으로 계속 전진하였고, 그의
용기에 감복한 소대원 3명도 함께 적의 진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정 소대장은 적의 거세지는 사격에도 계속 전진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적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날아온 적의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살신성인 정신으로 임무를 수행한 정 소대장의 죽음으로 분개한 소대원들은 즉시 공격을 가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적 진지를 탈환하였다.
정락구 중위는 생전인 1952년 7월 20일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전사 후에 그에게 백마고지 전투
등의 공적으로 1953년 6월 9일에 미국의 십자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이, 1953년 7월 1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정락구 중위가 받은 십자수훈장은 6‧25전쟁 중 한국인으로선 단 4명에게만
수여된 것이었으며, 정락구 중위의 유해는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3묘역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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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의 6·25 전쟁영웅, 임택순 공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임택순 공군 대위’를 ‘2021년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임택순 대위(1930.12.31.~1953.3.6.)는 6·25전쟁 중 1953년 3월 6일 강원도 고성 월비산지구와 351고지에서 작전 수행 중 적 대공포에 피탄되자 전투기와 함께 적 대공포 진지로 돌입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임택순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10일 공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제21정찰비행대대와 제15교육비행전대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3년 1월 5일 강릉 제10전투비행전대로 전속되어 F-51 무스탕을 조종하며 적진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3월 6일 임택순 중위(당시) 동부전선의 요충지로서 2년 동안 격전이 거듭되던 강원도 고성 351고지의 방어를 돕기 위해 열두번째 출격에 나섰다. 임택순 중위는 351고지의 적의 진지를 파괴하고 재차 공격을 위해 진입하던 중 적군의 대공포탄에 우측 날개가 피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때 지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전방공중통제관은 임 중위에게 신속히 탈출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그대로 기수를 적진으로 향해 마지막까지 조국을 위한 충정을 바치며 그렇게 아끼던 전투기와 함께 장렬히 산화하며 호국의 별이 됐다. 공군사관학교 출신 조종사로서 최초의 전사자가 된 임택순 중위의 전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4월 20일 대위로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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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의 6·25 전쟁영웅, '윌리엄 스피크먼' 영국 육군 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윌리엄 스피크먼(William Speakman) 영국 육군 병장을 2021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보훈처에 따르면 윌리엄 스피크먼(1927.9.21.~2018.6.20.)은 6·25전쟁 중 1951년 11월 4일 군사 요충지였던 마량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백병전을 감행,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중대 철수작전을 완수했다. 1927년 9월 21일에 태어난 스피크먼은 영국 육군 왕실 스코틀랜드 국경연대 제1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스피크먼(당시 이병)은 1951년 11월 4일 군사 요충지였던 경기도 연천 마량산을 방어하는 임무에 투입됐다. 당시에 수적 우위를 이용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전우가 부상을 당하자, 6명의 전우를 모아 적진에 수류탄을 던지며 백병전을 감행했다. 스피크먼은 전투에서 다리와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며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했고 중대는 피해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1952년 1월 부상 때문에 영국으로 후송되었지만, 3개월 뒤 자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해 8월까지 전장을 누볐다. 윌리엄 스피크먼은 전공을 인정받아 1952년 2월 영국 최고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고,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7월 태극 무공훈장을 수여하며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사를 표했다. 국가보훈처는 “자신이 싸워 지켜낸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라는 스피크먼의 유언에 따라 2018년 6월 타계한 그의 유해를 2019년 2월에 봉환식을 거쳐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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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의 6·25 전쟁영웅, 김갑태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김갑태 육군 중령’을 2021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갑태(1924.10.1.~1952.10.4.) 중령은 6·25전쟁 중 1952년 10월 2일 강원도 748고지(일명 피의 고지) 탈환을 위해 탁월한 전투 지휘로 기습 공격을 벌이다, 적이 쏜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져 후송된 지 3일 만인 1952년 10월 4일 전사했다. 깁갑태 중령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1951년 강원도 한석산·가리봉 전투와 현리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952년 4월 육군 제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장(대위)으로 부임하여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 우두산 일대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우두산 일대의 748고지(피의 고지)와 572고지(독수리 고지)는 이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사단의 주저항선까지 위협받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아군과 적군이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52년 10월 2일 당시 1중대장 겸 1대대장 대리 임무를 부여받은 김갑태 대위는 선두에서 부대원을 이끌며 일시 피탈당한 748고지(피의 고지) 탈환을 위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격전 중 적군이 쏜 포탄의 파편을 맞고 김갑태 대위가 쓰러지자 전 대대원들이 더욱 맹렬히 고지를 향해 돌격하여 마침내 748고지(피의 고지)를 성공적으로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갑태 대위는 후송된 지 3일 만인 1952년 10월 4일 전사했다. 정부는 748고지 전투에서 살신성인 정신으로 희생한 김갑태 대위의 공훈을 기려 을지무공훈장과 2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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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의 6·25 전쟁영웅, 레너드 라루 미국 선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미국 선장을 2020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레너드 라루(1914.1.14.~2001.10.14.)는 6·25전쟁 당시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배편으로 철수한 흥남철수작전에서 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의 선장이었다. 레너드 라루는 35세에 7,600톤의 화물선 선장이 됐고, 군수물자 수송 명령에 따라 함경남도 흥남 부두로 향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과 매서운 추위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흥남철수작전은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군인, 피란민, 군수물자를 선박을 통해 이남 지역으로 철수하는 계획이었지만, 군인과 피란민들을 다 태우기에는 선박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레너드 라루 선장은 단 한 명의 피란민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정원 60명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있는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승선시키기로 결정했다. 16시간 동안 탑승정원을 훨씬 초과한 만 4천여 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사흘간 항해 중에 태어난 5명을 포함한 승선자 전원이 12월 25일 경상남도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를 일컬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 기록에 오르게 됐다. 한편, 거제도포로수용소기념공원에 이러한 인도주의 작전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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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의 6·25 전쟁영웅, 로버트 리 티몬스 미국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 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로버트 리 티몬스(Robert Lee Timmons, 1919.5.14.~1950.8.23.) 미국 육군 대위를 2020년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로버트 티몬스 대위가 서북산 전투에서 적과 전투 중 전사했고, 아들인 주한 미 제8군 사령관과 손자인 미 육군 대위까지 3대(代)에 걸쳐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서북산 전투는 경상남도 함안에 위치하며, 6·25전쟁 당시 전라남도를 우회하여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향하던 적 6사단을 막기 위해 미군 제25사단과 국군이 고지를 사수했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19차례나 고지가 바뀌었고, 결국 미군 제25사단 제5연대가 승리함으로써 대구방면에서 적의 압력을 분산시켜 낙동강 방어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군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으로써 활동하다가, 하와이 주둔 부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6·25전쟁 당시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격전지였던 서북산 전투에서 중대장으로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고지를 고수하던 중 적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했고, 후송 중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의 시신은 1년 뒤에 발견되어 미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가 전투에서 전사할 당시 미국에 7살 아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의 전사로 군인의 길을 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리처드 티몬스는 1995년부터 97년까지 주한 미 제8군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 부임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하며 아버지가 전사한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이곳 서북산에 육군 39사단은 1995년 12월에 로버트 티몬스 대위를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그리고 로버트 티몬스의 손자(리처드 티몬스의 아들)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했고, 1996년부터 97년까지 1년간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하며, 대한민국의 방위를 담당하는 인연을 맺게 됐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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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의 6·25 전쟁영웅, 박양규 순경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시민의 안전을 사수한 ‘박양규 순경’을 ’2020년 10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보훈처에 따르면 1924년 2월 15일에 태어난 박양규 순경은 전라남도 나주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근무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주지역 방어를 위한 위수대로 활동했다. 박양규 순경은 1950년 9월 10일 나주시 교동에 있는 나주중학교에서 적을 탐지하기 위해 매복 근무 중 혈혈단신으로 적과 교전하여 적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장렬하게 전사했다. 보훈처에서는 박양규 순경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2016년 4월에 나주시 죽림길 20 나주역사공원 내에 위치한 ‘박양규 공 충혼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한편, 전라남도 나주경찰서에서도 고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계승하기 위해 충혼비 앞에서 매년 10월 21일 ‘경찰의 날’을 계기로 참배를 진행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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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의 6‧25전쟁영웅,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allory Almond) 미국 육군 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allory Almond) 미국 육군 중장’을 2020년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알몬드 중장(1892.12.12.~1979.6.11.)은 미국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1915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 후 제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하였고, 종전 후에는 맥아더 총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 및 참모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미(美) 제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지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흥남에서 철수작전을 계획했다. 흥남철수작전 시 병력 및 군수물자를 수송하기로 계획되었으나, 알몬드 중장은 현봉학 박사, 포니 대령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을 이남 지역으로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4일부터 12월 24일까지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 장병 10만 5천여 명, 피란민 10만여 명을 안전하게 이남 지역으로 철수시킨 인도주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은 전투력을 보존하고 1951년 1월부터 시행한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경상남도 거제시는 2005년 5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흥남철수작전 기념비를 세워 인류애의 기적이었던 이 작전을 기념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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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의 6·25 전쟁영웅, 지리산함(PC-704함) 57용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지리산함(PC-704함) 57용사’를 2020년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지리산함(PC-704함)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우리 해군이 국민 성금으로 도입한 최초의 전투함 4척 중 하나로, 1950년 7월에 배치된 직후부터 전선에 투입되었고 1950년 8월 덕적도·영흥도를 탈환하여 인천상륙작전의 관문을 열었으며 1951년 1월 황해도 월사리에서 피난민과 유격대원을 구조하는 등 수많은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지리산함 57용사는 “동해경비작전(작전명:28작전)에 임하라!”라는 해군본부 작전명령 제430호에 따라 1951년 12월 24일 10시 부산을 출항하여 25일 원산해역에서 삼각산함(PC-703함)과 교대하고 해상경비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원산해역은 갈마반도, 호도반도 등 육지에 북한 해안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도 등 도서지역은 아군이 정보수집 전초기지로 확보하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지리산함 57용사는 북한군이 원산 성남리 동북방에 기뢰· 지뢰 등을 은폐하여 두고 야간에 트럭을 이용하여 원산항 부근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거센 파도에도 불구하고 적의 기뢰부설 저지를 위해 야간경비작전을 강행하던 중, 12월 26일 새벽 적의 기뢰에 접촉되어 함정 침몰과 함께 이태영 함장 등 승조원 57명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 한편, 해군 제1함대사령부는 57용사의 숭고한 희생과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매년 12월 26일 지리산함 전사자 충혼탑(강원도 강릉시 통일공원 소재)에서 개최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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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6·25 전쟁영웅, 란가라지 인도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란가라지 인도 육군 중령’을 2020년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란가라지(1916.6.5.∼2009.3.23.) 중령이 지휘한 인도 제60야전병원은 1942년 8월 창설 부터 공수사단에 배속되어 공수훈련을 받은 의무장병들로 편성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경험과 더불어 인도 서북부 국경의 캐시미르(Kashmir) 산악지대에 18개월간 배치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 제60야전병원은 외과의사 4명, 마취의사 2명, 일반의사 8명, 치과의사 1명 등 총 341명으로 2개의 외과반과 1개의 치과반으로 편성되었으며,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한 후 2개 제대로 편성하여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하는 본대가 영국군 제27여단을 직접 지원하고, 배너지 소령이 지휘하는 분견대가 대구 후방병원을 담당했다. 제60야전병원 본대는 평양까지 진출한 후 유엔군의 전면적인 철수에 따라 의정부-수원-장호원으로 철수하였다가 유엔군의 재반격이 시작되면서 영국군과 함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또한, 1951년 중공군의 공세로 호주군이 주암리 북쪽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위생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방 고지까지 나아가 중상자들을 들것으로 실어오기도 했다. 이때 많은 중상자들이 응급조치 후 헬리콥터로 후방병원에 신속히 후송되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51년 10월, 유엔군의 코만도 작전에 참가한 인도 의무요원들은 총검과 수류탄 대신 의약품과 수술기구를 휴대하고 공격부대를 뒤따르면서 전상자들의 응급조치는 물론 험한 지형과 공산군의 저지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환자 수송작전을 전개하였다. 1953년 2월 란가라지 중령은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고 전장을 누비며 환자를 수술하는 등 진두지휘를 하던 약 25개월간의 6·25전쟁 참전 복무기간을 마치고 귀국했다. 인도정부는 그에게 ‘Mahar Vir Chakra’ 훈장을 수여했으며, 그가 지휘한 제60야전병원은 한국정부, 유엔군사령관, 인도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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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의 6‧25전쟁영웅, 장철부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장철부 육군 중령’을 2020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장철부 육군 중령’은 192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일본군의 일원으로 싸워야 하는 치욕감을 견디지 못해 2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金秉元)을 장철부(張哲夫)로 개명하였다. 이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사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에 입교하여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한 그는 계속 학교에 남아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지냈으며, 독립기갑연대 창설과 함께 기병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당시 장철부 소령의 기병대대는 경기도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진지를 구축하였고,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7월 11일에는 충남 공주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등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중상을 입고도 최후까지 총격전을 벌였으나, 대대 지휘소가 점령되기 직전“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라며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29년의 삶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려 중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2002년에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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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의 6‧25전쟁영웅, 김재현‧현재영‧황남호 철도 기관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김재현’ 철도 기관사와 ‘현재영‧황남호’ 철도 부기관사를 ‘2020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대전철도국 소속 기관사로 재직 중인 김재현, 현재영, 황남호는 6·25전쟁으로 대전시가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던 날인 1950년 7월 19일 충북 영동역에서 군수물자 후송 작전에 참여 중이었다. 이때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윌리엄 딘 소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장관이자, 당시 한국 지형을 알고 있는 미군 지휘관으로 많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이에 김재현 기관사 등 철도용사들은 미군 결사대 30여명과 함께 충북 옥천에서 증기기관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했다. 당시 대전에 남아있던 국군은 이미 16일에 철수한 상태로 대전으로 향하는 모든 철로는 북한군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기관차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적탄 속을 뚫고 대전역에 도착했으나 적의 기습으로 미군 결사대원 27명이 전사하였고, 김재현 기관사는 전신에 8발의 총상을 입고 장렬히 순직하였다. 현재영 부기관사도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황남호 부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하여 옥천역까지 퇴각하였다. 이러한 김재현 기관사 등 참전 철도용사들의 희생은 향후 병력, 군수물자 및 피난민을 수송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힘이 되었다. 미 국방부는 이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민간인이나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가장 훈격이 높은 공로훈장인 ‘특별민간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김재현 기관사는 1983년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에 안장되었으며, 현재영 부기관사는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황남호 부기관사는 2016년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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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의 6‧25 전쟁영웅, 성관식 해병대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성관식 해병대 소령’을 2020년 4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성관식 소령은 1928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나 1951년 3월 수원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1일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적군과 아군 간 전선이 교착되어 고지쟁탈전과 진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성관식 소위는 해병 제1연대 3대대 2소대장에 보직되어 장단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1952년 9월 중공군이 대규모의 인해전술로 방어중인 장단 사천강가 제36전진 진지를 포위 공격해오자 성관식 소대장은 연대의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시킨 가운데 교통호까지 진입한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특히, 적군의 포격으로 참호가 무너지면서 대원 5명과 함께 매몰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매몰된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전기를 찾아 교신을 재개, 아군의 포병 지원사격으로 고지를 포위하고 있던 적군을 격멸하였다. 또한 진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임진강 일대 아군 주저항선의 핵심 요충지를 확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성관식 소령은 해병대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에 힘썼으며 1958년 해병대 항공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58년 9월 안타깝게도 비행훈련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1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