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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덕정중학교 교육
양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2023 덕정중학교 장애인식개선교육 실시 2023년 5월 17일, 양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덕정중학교 전교생 400여명을 대상으로 장애인식개선교육을 실시했다. (장애인식개선교육 사진)이번 교육은 코로나19로 인해 축소된 대면 교육을 다시 시작하는 첫 걸음이였으며, 전문강사의 장애 유형에 대한 이론적 지식 제공과 모바일 Q&A 이벤트 등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편견과 선입견을 인식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임동건’ 발달장애인파트너강사의 드럼을 활용한 문화 교육은 학생들에게 발달장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향상할 수 있었으며 유대감 형성과 소통의 기회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임동건 발달장애인파트너강사 드럼 문화 교육 사진)장애인식개선교육에 참여한 학생은 “장애인을 위해 저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저희가 할 수 있는 노력은을 할 수 있나요?” 와 같은 다양한 질문으로 장애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은 앞으로도 양주시 내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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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세계인이 감동한 ‘영국 참전용사의 한국전쟁 이야기’...국가보훈처·영국남자 협업 제작 영상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6·25전쟁 제72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와 유튜브 채널 ‘영국남자’가 공동 기획·제작한 영상이 국내·외 누리꾼들에게 관심을 받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72년 전 발발한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유엔참전용사들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보훈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 ‘영국남자’와 함께 영상을 기획‧제작, 지난 6월 22일 공개한 뒤 현재 조회수가 218만 명에 달하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6일 밝혔다. ‘영국남자’는 국내·외 구독자 약 504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로 한국을 사랑하는 영국인 ‘조쉬’와 ‘올리’가 한국 음식을 중심으로 다양한 한국 문화를 체험·소개하는 영상을 제작, 게시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한 영상은 ‘6·25전쟁 참전용사가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이유’라는 주제로, 예방의학 전문의로 6·25전쟁에 참전한 알랜 가이(만90세) 영국 참전용사가 출연했다. 1932년생으로, 19살이던 1953년 1월 한국에 도착한 그는 당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른 채 최전방 부대를 돌며 말리리아와 출혈열 등의 전염병과 동상 예방법 등을 교육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상에서는 알랜 가이 참전용사는 계란찜, 갈비탕, 해물전, 막걸리를 비롯한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참전 경험담과 참전 후 재방한 초청행사를 통해 한국을 다시 찾았던 소회 등을 이야기 한다. 그는 영상에서 참전 당시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한민국은 건물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폐허였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본국으로 귀국 후, 환영 행사는 커녕 기차역에서 집으로 가는 차편조차 없어 8킬로미터를 걸어서 가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후에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안타까운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 자국의 상황과 달리, 국가보훈처가 진행한 재방한 행사를 통해 한국을 방문했던 알랜 가이 참전용사는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참전 후인 1990년대 초 한국을 찾았던 그는 “모든 경비를 지원해주고 마치 귀빈처럼 대접해줬다. (한국인들은) 저희를 잊지 않았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거 같다”라고 말했다. 특히, 재방한 초청 행사가 참전용사들에게 어떤 의미 인지도 소개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전쟁 포로가 된 전우가 한 명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없었지만, 비무장지대(DMZ)를 다녀온 날 정말 오랜만에 잠을 잘 잤다고 했다. 그제야 한시름을 놓은 거죠”라고 했다. 알랜 가이 참전용사는 영상에서 자신이 직접 쓴 〈한국전 참전용사, The Korean Veteran〉 라는 제목의 시를 직접 낭독하기도 했다. 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싸우며 고통을 무릅쓴 그들, 그들의 용맹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노라”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알랜 가이 참전용사는 영국참전용사협회 한국연락관으로 20년 넘게 한국전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저희가 있다는 걸 알아주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라는 바람을 전한 알랜 가이 참전용사는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저희 참전용사들을 위해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참전용사들 뿐만 아니라, 저희 자녀들과 손주들을 위해서까지 노력해주신 덕분에 앞으로도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라며 영상을 마무리했다. 이 같은 영상이 공개되자 국내·외 누리꾼들은 알랜 가이 참전용사 등 유엔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댓글이 잇따랐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현재 저희가 이렇게 번듯한 곳에서 살고 있음을 잊지 않을께요”, “할아버지(캐나다인)는 6, 70대가 되어 한국에 재방한해서 최상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에 대해 좋은 말만 했습니다” 등 어린 학생에서부터 군복무중인 현역 군인, 해외 거주 교포와 미국 참전용사, 캐나다, 필리핀 등 국내·외 누리꾼들이 다양한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영상은 7월 5일 현재 조회수 218만, 좋아요 10만, 댓글도 8,200개를 넘어섰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1975년 시작된 재방한 초청 사업을 비롯해 22개 유엔참전국과 195만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에 대해 감사와 예우를 다하는 유엔참전용사 후손 장학사업, 현지 위로·감사행사, 유엔참전용사 후손 평화캠프 등 다양한 국제보훈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영상출처=유튜브 영국남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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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한탄강사업소 지질공원팀 최동원 팀장
포천 한탄강은 다양한 지질학적 특징을 가진 지질, 생태의 보고다. 지난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면서 국제적인 지질생태 관광지로 크게 도약했다. 오늘날의 한탄강이 있기까지 많은 기관과 단체, 개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에 포천 한탄강사업소 최동원 팀장(43)이 있다. 지질·문화·역사의 보고, 한탄강최동원 팀장이 한탄강과 연을 맺게 된 때는 지난 2009년. 당시 포천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던 중 한탄강 상수원보호구역 해제 등을 대비해 인근 자원을 조사하게 됐다. 최 팀장은 “포천에는 서울과 관북지역을 연결하는 대로(大路) ‘경흥로’가 있었다.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형성된 ‘경흥로’는 한탄강의 지질생태학적 가치와 더불어 조선시대 관방, 경제, 정치, 유람(관광)등 다양한 가치를 더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즉, 한탄강은 지질학적 가치뿐 아니라 선비들의 유람문화로 대변되는 역사·문화학적 가치를 지니는 곳이다.”고 말했다. 현재 한탄강은 대한민국 단일하천 중 국가지정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으로, 유네스코에서 인증받은 26곳의 한탄강 지질명소 중 10곳이 포천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에 이르기까지지질문화 역사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한탄강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현장실사 심사자들이 유네스코 제출 보고서에 ‘한탄강 지질공원의 완전성을 위해 화산 분출지이자 발원지인 북한 강원도 평강군 일대까지 조사 및 범위의 확대가 필요하다’며, ‘인증 보류’ 의견을 제출한 것. 남북관계 개선이 선행되어야 가능할 일이었다. 최 팀장은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한탄강의 가치를 세계에 알릴 기회였기 때문이다.”라며 “마침 인도네시아 롬복에서 아시아태평양지질공원 총회가 열렸다. 밤샘을 거듭해 만든 대응자료를 가지고 세계 각국의 지질공원 위원 한 명 한 명에게 배부하며 한탄강을 소개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세계지질공원위원회 회의에서 표결까지 가는 치열한 공방 끝에 인증 통과가 가결, 한탄강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7월의 일이었다. 함께 가꿔나가는 모두의 한탄강 지질공원한탄강사업소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알리고 지역 상권이 활성화되도록 ‘포천 한탄강 리버마켓’을 개최했다. 또한, 6월 중 비둘기낭 인근에 ‘한탄강 지오샵’ 개설하고 지역주민이 관광두레를 통해 직접 개발한 포천과 한탄강 지역의 특화 관광상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도록 도울 예정이다. 최동원 팀장은 “지역사회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필요를 채우며 자연경관을 보호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지역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한탄강을 보호하고 가꾸며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나갈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지원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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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생 선생, 중경 임시정부의 ‘입’으로 활약한 김구 선생 맏며느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안미생 선생(1919.7.13.~2008.11.24.)은 1940년대 중국 중경에서 한국독립당 당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동생인 안정근 선생(‘87 독립장)의 딸이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62 대한민국장)의 맏며느리로, 외국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아 중경 임시정부의 비서로 활약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때 중간 경유지인 상해 공항에서 밝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사진 촬영에 임해 남다른 성격과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독립운동 명문가로 잘 알려진 안중근 가문과 김구 가문의 만남으로도 기억된다. 부친인 안정근 선생은 물론 오빠 안원생 선생(‘90 애족장), 남편 김인 선생(‘90 애족장)이 이미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어 대를 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손꼽힌다. 선생은 안타깝게도 1960년대 미국 이주 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에서야 선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다 2008년 쓸쓸히 사망한 사실이 알려져 세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22년 제103주년 3.1절을 맞이하여 건국포장을 추서했다(자료 및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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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데이비스 선생, 독립만세운동의 횃불을 든 일신여학교 교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Margaret Sandeman Davies, 1887.1.12.~1963.6.24.) 선생은 부산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이끈 호주인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11일 부산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동교생들의 만세시위를 이끌고, 이후 시위 참가 학생들을 보호하다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불기소되었다. 또한 일본이 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에 광분하던 시기인 1940년 3월 호주 장로회의 신사참배 반대 결정을 엄중히 받아들여 이로 인해 일신여학교가 폐교되었고 선생은 호주로 귀국했다. 일신여학교 3월 11일 만세시위는 부산·경남 3.1운동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외국인이 시위 계획·실행과 사후 수습을 주도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로,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장시간 조사를 받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당시 상황을 얼마나 위중하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다만 선생은 외국인인 점이 고려되어 기소되지 않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22년 3.1절을 맞이하여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번 3.1절에는 선생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감독(기숙사 사감) 이사벨라 벨레 멘지스 선생(Isabella Belle Menzies), 선교사 데이지 호킹 선생(Daisy Hoking) 등 호주인 3명이 일신여학교 만세시위를 이끈 공로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고, 같은 시위에 참여한 일신여학교 학생 12명도 서훈된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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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도 선생, 일본 군경의 유혈 진압에 굴하지 않고 시위 동참을 호소한 독립운동가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천연도 선생(1890.11.19.~1923.6.28.)은 일본 군경의 유혈 진압에 굴하지 않고 전북 남원군 남원시장에서 시위 동참을 호소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9년 4월 4일 전북 남원군 남원시장에서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시위 동참을 호소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남원시장의 만세시위는 일본 군경의 잔인한 유혈 진압 중 하나로 기록된다. 사망자 7명, 중상자 10여 명이 발생할 정도로 피해 규모가 컸다. 그만큼 당시 시위가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시위 확산에 선생이 크게 기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선생은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는데, 보안법 위반 최고형이 징역 2년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무거운 처벌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22년 3.1절을 맞이하여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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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남 선생, 지방의 토착 조직을 독립운동에 활용한 주비단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오수남 선생(1900.8.26.~미상)은 황해도 일대에서 대한독립군사주비단 단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한 독립운동가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20년 12월∼1921년 3월 황해도 해주·연백군 일대에서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대한독립군사주비단 단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았다. 1920년 말부터 1921년 초까지는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상징되는 한국 독립운동의 침체기로 일컬어진다.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만주 독립군은 봉오동전투 등에서 값진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은 봉오동전투 참패 이후 국내외에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하여 한인 독립군과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독립군과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선생의 활동은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결사(대한독립군사주비단)가 토착종교인 제우교(濟愚敎)를 활용해 비밀리에 한인의 침체된 독립의식을 일깨우고, 군자금을 모집해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22년 3.1절을 맞이하여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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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임순 선생, 광주학생운동 지지 시위에 앞장선 여학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안임순 선생(여, 1912.5.6.~1994.3.28.)은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함남 함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30년 1월 서울에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선생은 서울에 ‘광주사건 옹호동맹 중앙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등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조직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후일 미국으로 이민하여 1982년 L.A. 3.1여성동지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오르는 등 독립정신을 국외 교포사회에 확산시키고자 앞장섰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22년 3.1절을 맞이하여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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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도 선생,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 연대를 호소한 독립운동가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김공도 선생(여, 1897년~1965년 이후)은 미국 하와이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무 등 민족운동단체 간부로 활동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 연대를 촉구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44년 이후 미국 하와이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무, 애국부인회 회장, 대한부인구제회 호놀룰루지방 대표원 등으로 활동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과 독립운동 연대를 촉구하는 글을 게재했으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선생은 1910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신부는 1900년대 이후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실물 확인 없이 사진만으로 혼인이 결정된 모국의 신부들을 가리킨다. 선생은 사진신부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하와이 한인 여성사회의 지도자로 우뚝 성장했으며, 무엇보다 재미 한인사회의 분열상을 안타까워하며 한인의 단결과 독립운동 연대를 호소했다. 국가보훈처 자체 발굴로 공적심사를 진행한 결과 정부는 2022년 3.1절을 맞아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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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숙 회장-대한적십자사 봉사회 포천지구협의회
‘노란천사’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재난 재해로 이재민이 발생할 때마다 노란조끼를 입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포천 곳곳 필요한 곳에 나눔을 더하고, 위급한 순간 생명을 살린다. 대한적십자 봉사회 포천지구협의회의 이야기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증, 이들의 활약은 더욱더 뜨겁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은숙 회장(49)이 있다. 우리는 생명을 구하는 모든 활동을 합니다한은숙 회장이 포천 적십자 봉사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7년, 적십자의 ‘우리는 생명을 구하는 모든 활동을 합니다’라는 슬로건이 마음을 끌었다. 평소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두 번 생각 않고 봉사회에 가입했다. 그는 “적십자 봉사회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면에서 여타 봉사단체와 비슷하지만, 주요 활동이 ‘재난구호’인 만큼 특수성과 차별성을 지닌다.”라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른다는 재난 상황의 특성상, 봉사회 활동시간도 대중없다. 한은숙 회장은 “포천시 14개 읍면동에서 총 498명의 적십자 봉사회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라도 간다. 그게 우리다.”라며 자부심을 보였다. 코로나19 속 빛나는 헌신적십자 봉사회 회원들은 재난구호 외에도 생계·주거·의료·교육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전개 중이다. 자비를 들여 안전교육과 재난교육도 받는다. 지난 2016년에는 교육을 받은 봉사회 회원이 음식점에서 갑자기 쓰러진 시민을 심폐소생술로 구한 사례도 있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포천 적십자 봉사회의 활동은 더욱 바빠졌다. 구호물품과 방역물품을 보건소에 전달하고 재택치료자에게는 처방약을 전한다. 선별검사소를 찾은 시민들을 안내해 안전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한편, 급감한 혈액 보유량 회복을 위해 꾸준히 헌혈캠페인도 진행한다. 코로나19 발생 초, 마스크 부족 사태로 전국이 들썩이고 있을 때 포천 적십자 봉사회는 새마을 부녀회, 구절초교육봉사팀 등 관내 봉사단체와 함께 ‘포천수선마스크’를 만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포천수선마스크는 생산공정 중 끈 부착 미흡으로 폐기를 앞둔 마스크를 일일이 수선 후 멸균·소독해 배포한 것으로 당시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한은숙 회장은 봉사회 활동을 하는 매 순간 보람찼다고 말한다. 그는 “갑작스런 재해로 덜덜 떠는 손에 구호품을 안겼을 때, 당장 끼니 걱정에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졌을 때 등 모든 순간이 다음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이 일을 계속하시는 회원들이 많은 이유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포천지역 적십자 봉사회 회원 중에는 칠순이 훨씬 넘은 고령 회원이 45명이나 된다. 거의 매일 봉사활동을 하는 덕분에 한 회장의 봉사시간은 지난해 말 기준 6,907시간을 넘겼다. 매년 1,000시간 이상 누적 중이다. 주변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으로 적십자사 총재 표창, 행안부 장관 표창 등 굵직한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온기를 전할 수 있어 행복하다. 더 많은 분이 이 행복에 동참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자료제공=포천시청 언론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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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최후남 센터장
현재의 선택이 미래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소년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유·아동기와 달리 자기 의지로 미래를 선택해 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이들은 고민이 많다. 심리적인 좌절과 불안, 불만, 반항, 일탈 등 정서적인 동요도 나타난다. 포천시 소흘읍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을 위한 전문가가 있다. 포천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최후남 센터장(50)이다. 이심전심, 선배 청소년지난 2000년 설립된 포천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는 상담과 심리검사, 교육, 연구 프로그램 개발, 지역사회 청소년 통합지원체계 운영 등 포천지역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성장을 돕는 청소년 전문상담기관이다. 최후남 센터장은 “교사와 학부모를 위한 각종 교육과 상담도 진행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의 호응이 더 높다. 이심전심, 전적으로 아이들 입장에서 마음과 생각을 대변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관심사와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그는 센터에서 자타공인 ‘선배 청소년’으로 통한다. 꿈보다 가능성최후남 센터장은 청소년들과 진로 상담을 할 때 꿈을 묻지 않는다. 섣부른 조언도 삼간다. 그는 “꿈보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어차피 꿈이라는 것도 아이들이 가진 많은 가능성 중 하나 아닌가. 어느 한 가지로 한정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 덕분에 상담을 하는 청소년들은 종종, ‘해방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학부모의 만족도도 매우 높다. 학교 밖 청소년의 울타리포천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는 학교 밖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꿈드림사업도 진행 중이다. ‘꿈드림’은 상담과 교육을 병행하며 청소년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자립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울타리인 셈이다. 동아리 활동과 문화예술 활동은 물론 청소년들의 의사에 따라 복학, 취업, 자격증 취득을 돕기도 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원하는 청소년을 위해 검정고시 대비반도 별도 운영 중이다. 실제로 검정고시 대비반을 통해 시험에 합격한 한 학생은 ‘예전의 내 모습과 같은 동생들을 돕겠다’며 청소년지도자의 길을 선택, 사이버대학 청소년지도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다. 또 하나의 가족, 청소년동반자사람은 누구나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이 그 역할을 담당하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환경도 있다. 최후남 센터장은 “‘청소년동반자’ 사업은 청소년의 정서적, 심리적 지지자가 되어 성장을 돕는 청소년 전문가 프로그램”이라면서 “상담과 더불어 아이들에게 필요한 지역복지서비스를 연계해주는 등, 가족처럼 챙긴다. 아이들도 ‘청소년동반자’를 자신들의 ‘보호자’라 말하곤 한다.”라고 말했다. 2만 1천 포천 아이들을 위하여제각기 상황도 사정도 다 다르겠지만,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모두 같다는 최후남 센터장. 그는 “문제행동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커가는 과정일 뿐.”이라면서 “2만 1천 포천 청소년들이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당당히 나아가도록 한발 앞서 등불을 켜 두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한명 한명 만나 마음을 보듬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라나길 바란다.”며 미소지었다.[기사제공=포천시청 홍보담당관 언롱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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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과 함께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자 광복군, 한태은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한태은(韓泰恩)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41년 5월 중국 중경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부녀복무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이듬해 11월 한국광복군이 확대·개편될 때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2년 4월 16일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고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 등으로 활동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이정호(李貞浩) 선생이 부군이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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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을 ‘통일의회’에 바칠 것을 제창한 여성 의원, 지경희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광복 직전까지 중국 중경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한 지경희(池璟禧)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43년 10월부터 1945년 8월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하기 전까지 임시의정원에서 함경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주목할 것은 광복을 전후한 시점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나아갈 길에 대해 명료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생은 1945년 8월 13일 임시의정원 의장 앞으로 보낸 제안서에서 그동안의 사정을 고려해도 “대한민국의 주권을 27년 이래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 행사한 것은 부당했다”고 지적하고 조국의 해방을 맞아 마땅히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진로와 관련해서도 동년 8월 23일 조국 광복으로 국내에 “전국 통일적 임시정부가 건립될 것이 명백”하므로 현재의 “국무위원회는 총사직하고 간수내각(看守內閣: 과도내각)을 조직하여 긴급한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역설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아 27년을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서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던지는 자세는 선열들의 희생을 딛고 풍요로운 오늘을 살아가는 후대들에게 독립운동의 참된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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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관료의 ‘매족’ 발언을 규탄하다 옥고후 순국한 김원석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조선인 도평의원의 민족모욕을 규탄하다 고초를 겪고 순국한 김원석(金元錫)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7년 3월 경남 통영에서 조선인 교육 폐지 등 동족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은 경남 도평의원 김기정(金淇正)을 규탄하는 시민대회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8개월, 벌금 30원을 받았다. 발언내용이 알려지자 선생은 자신의 명의로 김기정에 대한 징토문(懲討文)을 작성하여 통영시내에 배포하였고 김기정의 매족적 발언은 동년 3월 15일 시내 봉래좌에서 개최된 ‘김기정 대징토회 진상보고회’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에 시민대회 집행위원회는 「김기정을 사회적으로 절교할 것, 김기정의 죄악을 전 조선민에게 공포할 것, 김기정의 죄악을 들어서 성토연설회를 개최할 것, 김기정이 가진 일체의 공직을 사임케할 것」 등 4개항을 결의, 여러 달 동안 조선인 도평의원 김기정에 대한 규탄 집회 열기가 통영 전역을 달구었다. 선생은 이로 인해 소위 명예훼손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년 넘게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2개월 만에 옥고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도평의회 의원의 민족 모욕을 정면으로 규탄함으로써 1920년대 일제의 허울 좋은 ‘자치제’, ‘참정권’ 미끼를 통한 조선의 영구지배와 동화정책을 폭로하고 조선인 유력자의 친일행위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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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원산에서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최종현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미국 의원단 방한을 기회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최종현(崔鍾泫)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0년 8월 함남 원산에서 미국 의원단의 방한소식을 접하고 동년 9월 장춘교(長春橋) 부근에서 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찰관 주재소와 우편소, 일본인 상점 등을 공격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목할 것은 원산의 만세시위가 선생이 참여한 비밀결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선생 등은 만세시위가 있기 한달 전 원산에서 동지 김종한(金宗翰)을 단장으로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하고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켜 독립의식을 고취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9월 22일 밤 선생은 동지들을 자택으로 불러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이튿날 원산시내에서 이른바 ‘불온창가’를 선창하며 수 백명이 참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일제가 자신들의 조선지배가 동양평화를 위해 필요하고 조선인이 승복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미국 의원단을 초청하자 이에 맞서 절대독립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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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 만세운동 참여하여 고초를 겪은 ‘유관순 마을’의 유중제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50세가 넘은 나이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유중제(柳重悌)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충남 천안군에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笞) 90도를 받고 고초를 치른 뒤 1년이 채 되지 않아 이듬해 2월 작고했다. 천안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병천시장에 모인 3천여 군중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당초 천안의 만세운동은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과 동면(東面)의 두 방면으로 추진되었는데, 선생은 동면 용두리 출신으로 조인원(趙仁元)(90, 애족장) 선생의 아들 조병호(趙炳鎬)(90, 애족장), 유관순 열사의 부친 유중권(柳重權)(91, 애국장), 숙부 유중무(柳重武)(90, 애족장) 등이 주도한 동면 방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동면계의 만세운동은 유관순이 이화학당 재학 중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시위에 참가했다가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내려와 동리 어른인 조인원, 아버지 유중권 등에게 보이고 서울의 상황을 알리면서 시작되었다. 병천시장 만세시위는 규모만큼이나 양상도 격렬하여 사망자만 19명에 달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한 향토사학자가 천안지역 시위참가자 26명의 「범죄인명부」를 발굴, 확인하고 포상을 신청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에 따르면 태형을 받은 12명 가운데 9명은 유관순 열사가 살았던 용두리 주민인 바, 이 가운데 8명이 태형 최고형인 90대를 받았다고 한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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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인터뷰] 사회공헌기업, 마스크 생산업체 ‘가드플러스’ 박상준 대표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취약계층 및 군부대 등에 마스크 기부를 지속하고 있는 마스크 생산 기업 '가드플러스' 박상준 대표를 만나 기업인으로서 지역사회 공헌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가드플러스'는 경기도 포천시 동교동 소재 마스크 생산업체로 덴탈마스크 상품명 '짱돌마스크'를 생산·판매하는 기업이다. 박상준 대표는 “(가드플러스는) 원 본사 ‘하이텍스원’이 있는데 마스크 부자재를 하다보니까 많은 국민들과 어려운 분들에게 지원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생산하게 됐습니다. 제가 운영을 하면서 매출 의도도 많지만 저희가 버는 것 만큼 일부라도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장애인협회나 독거노인, 군부대 등에 기부하고 있으며, 큰 돈이나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일부 조금씩 나눠쓰는 마음으로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저번에 포천시나 여러곳에서 (마스크)지원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기부)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더 취약한 부분에 대해서 조금씩 더 파고 들어서 보람된 일이 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하이텍스이나 가드플러스에 대해서는, 하이텍스는 포천시에서 많이 알고, 저희가 코로나19 전에도 10년이 넘은 회사이기 때문에, 코로나 때에 이윤을 챙기려고 (마스크 값을) 단 1원도 올리지 않는 상태에서 운영을 해왔고, 바보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아직도 똑같습니다. 국민들이 쓸 수 있고, 저희가 자재를 저렴하게 주면 마스크도 저렴하게 나올거라는 신념하나로 지금도 계속 밀고 갈 예정이니, 회사 혹시 보시면 (마스크 가격이) 저렴한 회사다 생각하시고, 운영에 차질 없도록 제가 잘 운영하겠습니다. 저희 직원들도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많이 도와주셨으면 감사하고, 혹시나 더 어려운 분이 계시면, 혹시 방송을 보고 오시면, 전화주시면 저희가 많은 양은 아니더라도 일부 쓰실 수 있도록 기부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영상취재·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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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영웅 얍 대위의 딸인 이사벨리타 얍 아가논(Isabelita Yap-Aganon)
아가논은 1993년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는데, 판문점에 가는 길에 어머니께서 감정에 북받치셨는지 눈물을 보이셨다고 과거를 회상했다.또한, 그로부터 몇 년 후에도 다시 한국에 가게 되어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는데 그때 감정에 복받쳐 눈물이 났었다고 전하면서,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버지의 영혼이 한국에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작년은 한-필리핀 수교 70주년이었던 해로, 앞으로도 양국 국민들 간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콘라도 얍(Conrado D. Yap) 대위는 1950년 9월 19일 필리핀 육군 제10대대전투단 전차 중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1951년 4월 23일 율동전투에서 방어진지를 사수하고 전사했으며, 지난 ‘19년 4월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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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국전 참전협회장인 막시모 푸리시마 영(Maximo Purisima Young)
전쟁 당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다시 방문한 한국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어 놀랐다고 언급하면서 근면 성실한 한국인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또한, 한국정부에서 참전용사들을 예우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위한 교육 지원을 하는데, 이것이 참전용사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그의 아들인 워터 영(Water Young)은 참전용사 아들로서 아버지께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셨다는 것을 항상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하면서, 전쟁 당시 필리핀군이 추운 날씨 속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우호국에 대한 희생정신을 보여준 역사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상황에서 한국정부에서 유엔참전용사를 위해 마스크를 전달한 것은, 전쟁 당시 참전용사가 한국인들에게 보여줬던 사랑을 한국 정부에서 필리핀과 참전국에게 다시 돌려준 것으로, 아주 놀랍고 정말 존경스러운 일이라고 언급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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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을 지원한 파란 눈의 ‘광복군’, R.C. 베이컨 선생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인도-버마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연락장교(대위)로 활약한 R.C.베이컨 선생께 2020년 8월 15일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43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인도주재 영국군 장교로 S.O.E(Special Operation Executive)에 소속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와 연락업무를 담당하며 대적(對敵) 선무공작 및 문서번역 등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캐나다 출신인 베이컨은 한국에서 10년간 기독교 감리교회 선교사로 활동하여 한국어가 유창했고 인면전구공작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45년 3월 13일 전사할 때까지 S.O.E의 136부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0월 26일부터 1944년 9월 15일까지 한국광복군 연락장교로 활약했고, 전지선전대(IFBU)에 소속되었다.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요청하여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된 부대로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전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선생의 활약상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과 영국 간 공동작전의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