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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0-13 2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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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 의사의 모습. ⓒ독립기념관


이봉창 의사는 1900810, 효녕대군의 후손인 부친 이진규씨와 모친 밀양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용산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졸업한다.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의 종업원으로 일했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생으로 근무했다. 두 직장에서 일본인 직원들에게 계속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던 이봉창 의사는 이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 선생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로 생활하며 일본 생활을 익혔다.

 

6년 일본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의 모습을 한 한국인 청년을 의심한다. 그들은 이 청년을 계속해서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그 자는 하오리(일본식 의복)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며 그가 단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그와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이봉창 의사의 인생관에 크게 감복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일왕폭살을 위한 거사는 꼬박 1년의 준비 시간이 걸렸다. 김구 선생이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폭탄을 구하는 동안,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19311213,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며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이봉창 의사가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독립기념관


선서식을 행한지 4일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 선생에게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이윽고 193218, 이봉창 의사는 앵전문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을 말이 다쳤으나,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선생은 같은 해 930일 오전 9, 경찰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0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 이봉창의사 의거 보도 기사(1932.01.08.) ⓒ독립기념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의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살 의거는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준다.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그들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했고, 이로 인해 이전에 좋지 않았던 한중 국민의 감정 대립도 없어진 계기가 된다. 또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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