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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3-26 11:5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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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안중근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3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모식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외손녀 황은주, 외증손자 이명철 등 유족과 친족, ()안중근의사숭모회 임원과 회원, 잠수함사령부 장병, 시민, 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 육군사관학교 생도대표 최후의 유언 봉독, 참석 내빈 추모사, 감사패 수여, 안 의사 순국 109주기 전국 학생 글짓기대회 수상자 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평화주의자안중근 의사를 널리 알린 스즈키 히토시씨, 개인택시운전사 박상순(74), 서울 중산고등학교 교사 이봉규(58) 3명이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요코하마 시립중학교 교사였던 스즈키 히토시(鈴木仁)씨는 본인이 재직했던 학교 등에서의 수업을 통해, 일본 내에서 암살자 또는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고 있는 안중근 의사를 올바로 알리기 위해 적극 노력해 왔다. 또한, 일본 학생들은 물론 매년 우리나라 전북 전주 근영중학교를 찾아 한국학생들에게도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알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박상순(74)씨는 개인택시 운전을 하며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자료를 제작해 승객들에게 배부하고 있고, 서울 중산고등학교 교사 이봉규(58)씨는 학생들의 글짓기 참여와 현충시설 답사 등을 통해 안 의사의 애국평화정신을 교육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1879.09.02.1910.03.26.)는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 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다가 돌아와 사재(私財)를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회령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였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金起龍조응순(趙應順황병길(黃柄吉)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다.

 

19099,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의거 당일인 10269시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러시아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1909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했다.

 

19102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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