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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4-08 17: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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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6회 송재 문화제48, 전남 보성군 서재필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기념식은 김경탁 전남동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해 각계인사, 회원,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사 보고, 헌공다례, 헌화 및 분향, 추모기도, 추모헌시낭독, 추모사, 감사장 수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송재 서재필 선생(1864.01.07.1951.01.05.)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해 18823월 문과에 급제하여 서적 발간을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로 활동하던 중, 개화사상의 거두인 김옥균 등과 함께 1884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선생은 일본 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고학으로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8947월 본국의 갑오개혁 추진 내각에 의한 사면령으로 189512월 귀국했다.

 

1896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18967월 국내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쳐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했다. 또한, 18983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 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과 개혁에 대한 국민의 자주 독립 사상과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94,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외교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대한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평생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선생은 6·25전쟁 발발하자 조국의 불운한 명운을 통탄하다 미국에서 19511월 서거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된 선생은 19944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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