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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8-19 18: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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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김희자 기자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는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일강(一江) 김철(金澈)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의 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영광군·함평군과 영산 김씨 문중에서 19758,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 506-1 자리에 건립했다.


김철 선생(1886~1934)1886년 당시는 영광군 관할 행정구역인 전라남도 함평군 구봉마을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915년 일본에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한 후 일제강점기에 귀국했다.


▲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 / 사진촬영=중앙보훈방송 김희자 기자]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안의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눠주었고, 노비들에게도 한보따리씩 챙겨주며 자유롭게 살도록 했다. 나머지 재산도 다 정리해서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의 건물 문제도 선생이 해결했다. 초기 임시정부 청사의 소유권자가 김철 선생이었다.


김철 선생은 19191월 상하이에서 여운영 등과 신안청년당을 결성하고, 2월에는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손병희 선생 등과 만나 3·1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 / 사진촬영=중앙보훈방송 김희자 기자]


선생은 서병호, 선우혁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가 그해 4월 다시 상하이로 들어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전라도 대표 의정원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192612월에는 김구 내각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고, 19278월 이동영 내각 때는 군무부장을 지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항저우로 옮겨 김구는 군무를 맡고 선생은 재무담당 국무위원이 되었다가 무임소장 국무위원 비서장에 피선되었다.


▲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 / 사진촬영=중앙보훈방송 김희자 기자]


선생은 김구 선생과 함께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폭압에 맞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비밀리에 일제 지도부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세웠다. 아울러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통해 독립운동에 활력 불어넣었다.


자신의 젊음과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에다 급성폐렴이 겹쳐 1934629일 항저우에서 4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희자 기자 khj-pizz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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