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기념관 2022년 7월의 호국인물, ‘홍대선 해군하사’ 선정...신형 유도탄고속함(PKG) 12번함, 홍대선함 명명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7월의 호국인물로 ‘홍대선 해군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홍대선 하사(1929.1.14.~1952.1.4.)는 1929년 1월 14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했다.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가던 1951년 10월, 북한군은 서해안 옹진반도에 진지를 구축하고 우리 군이 주둔 중이던 서해 도서 지역에 기습상륙을 도모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은 해상을 통제하고 피난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탁수작전(濁水作戰)으로 명명된 서해안 경비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때 홍대선 하사는 LST-801함(천안함)의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 상륙주정)정 정장으로서 작전에 참가하였다. 1952년 1월 4일, LST-801함에 순위도(巡威島) 피난민 840명을 안전하게 호송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홍대선 하사는 LCVP정으로 피난민을 LST-801함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때 북한군이 피난민 호송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해군을 발견하고 경기관총과 박격포 등으로 공격하며 전마선(傳馬船: 배와 육지사이의 연락을 맡아하는 배)을 이용하여 순위도에 상륙하려고 하였다. 홍대선 하사는 피난민 수송을 다른 단정에게 맡기고 자신의 LCVP정으로 북한군의 전마선을 향해 돌진, 파괴하여 적의 상륙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충돌 공격으로 LCVP정도 파손되어 더 이상 피난민 호송작전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홍대선 하사는 피난민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기 위해 인근 예안리 해안에 홀로 상륙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켜 북한군의 사격을 유인하였다. 북한군을 향해 기관단총으로 응사하던 그는 결국 북한군이 쏜 탄환에 흉부와 복부를 맞고 전사하였다. 홍대선 하사의 희생으로 순위도 피난민 840명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정부는 홍대선 하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52년 11월 8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은 신형 유도탄고속함(PKG) 12번함을 홍대선함으로 명명하여 그의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2년 6월의 호국인물, 제2연평해전 6용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6월의 호국인물로 ‘제2연평해전 6용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일 월드컵 막바지였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연평도 부근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 NLL)을 침범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북한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참수리-357정과 참수리-358정이 긴급 출동하였다. 우리 해군은 남하하는 북한 경비정을 향해 퇴거 경고 방송과 함께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차단기동을 실시하였다. 10시 25분, 근접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하던 참수리-357정을 향해 북한 경비정이 모든 포를 동원하여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북한 경비정은 미리 공격을 준비하고 배를 지휘하는 함교와 조종하는 조타실을 정확히 노려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참수리-357정을 지휘하던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전사하고 부장 이희완 중위가 중상을 입었다. 참수리-357정 승조원들은 지휘관이 전사·중상을 입어 지휘체계에 손상을 입은 상황 속에서도 40mm 함포와 20mm 벌컨포, M60기관총 등으로 북한 경비정을 향해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우리 해군 고속정과 경비 중인 초계함 등이 교전에 참가하여 북한 경비정을 향해 대응사격을 실시하였다. 10시 50분, 25 분간의 교전 끝에 우리 해군의 집중 포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은 화염에 휩싸인 채 다른 북한 경비정에 예인되어 북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은 적 경비정 1척을 격파하고 적 30여 명을 사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군은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하였으며 참수리-357정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윤영하 소령은 교전규칙에 따라 참수리-357정을 지휘하던 중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진))는 적의 공격이 조타실로 집중되는 상황에서도 배에 타고 있는 승조원들의 안전을 위해 손을 조타기에 끈으로 묶고 키를 유지하던 중 전사하였다. 조천형 상사(당시 중사(진))과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는 20mm 벌컨포 사수로서 응전하다 적의 집중 공격을 받아 방아쇠를 잡은 채 전사하였다.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는 M60 기관총 사수로 교전 중 적의 흉탄에 전사하였다.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은 의무병으로서 자신이 부상한 상황 속에서도 승조원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하였다. 또한 전사한 서후원 중사 대신 기관총을 잡아 응사하던 중 집중 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교전 후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전사하였다. 정부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용사의 공훈을 기려 전원 1계급 특진과 함께 윤영하 소령·박동형 병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한상국 상사·조천형 상사·서후원 중사·황도현 중사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2년 5월의 호국인물, ‘김지섭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5월의 호국인물로 ‘김지섭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김지섭 의사(1884.7.21.~1928.2.20.)는 1884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북면 오미동(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공립 상주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집안 족형 김응섭의 영향으로 진로를 바꿔 재판소 통역관 시험에 합격, 1909년 금산구(錦山區)재판소 통역관보 겸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고, 각별한 관계였던 금산군수 홍범식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1913년 모든 직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으로 망명한 김지섭 의사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가입 이후 총독부 등 조선 내부의 식민통치기관 및 주요 인사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을 경성으로 반입하였으나 아쉽게도 경찰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외에도 거사를 위한 군자금 모금 등 활발한 투쟁 활동을 벌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격노한 김지섭 의사는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의열단원들과 일본 제국 의회 개회 중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고 직접 의거를 자청하였다. 12월 20일 수류탄과 여비를 건네받고 일본으로 밀항한 김 의사는 10일 뒤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이듬해 1월 3일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했다. 그러던 중 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 목표를 일본 왕궁으로 변경하였다. 1월 5일, 궁성이 있는 히비야로 향한 김지섭 의사는 해가 지자 궁성 정문 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니주바시 투탄 의거). 그러나 폭탄을 지하에 오래 보관한 탓에 습기가 들어 뇌관이 작동하지 않았고, 급박한 나머지 다른 폭탄도 안전핀을 뽑지 못한 채 던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지섭 의사는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치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투옥된 지 4년만인 1928년 2월 20일 순국하였다. 유해는 화장되어 고향에 안장되었다가 광복 후 사회장으로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로 이장되었으며 2004년 11월 2일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김지섭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2년 4월의 호국인물, ‘윤봉길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4월의 호국인물로 ‘윤봉길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윤봉길 의사(1908.6.21.~1932.12.19.)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신문과 잡지 『개벽』 등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의 필요성과 민족의식, 식민 통치 저항정신을 함양한 윤 의사는 1929년 직접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야학 교재인 『농민독본(農民讀本)』 제작, 농민조합 결성, 농촌진흥을 위한 월진회(月進會) 조직 등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을 남기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이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상하이 사변 전승행사 및 일왕 생일 축하식’이 열린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이 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거사 당일 훙커우 공원으로 이동한 윤봉길 의사는 축하식이 시작되고 기미가요 합창이 끝날 무렵 단상으로 준비한 폭탄을 던졌다(훙커우 공원 투탄 의거). 이 투탄 의거로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사망하고 주중 일본 총영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9사단장 우에다 켄키치[植田謙吉] 등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金沢] 미츠코지산[三小牛山]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가나자와 공동묘지 관리사무소 앞 좁은 통로에 암장되었다가 광복 후 이봉창·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現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덕산에 충의사를 건립하고, 1988년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공원에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건립하여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1994년, 의거가 일어난 루쉰공원 내에 기념관 ‘매헌(梅軒)’을 건립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2년 3월의 호국인물, ‘장인환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3월의 호국인물로 ‘장인환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장인환(1876.3.10.~1930.5.22.) 의사는 1876년 3월 10일 평안남도 평양군 대동면 선교리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장 의사는 1906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상항(上港, 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에 참여하고, 1907년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을사늑약 등을 체결하는데 일본을 도운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이 미국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들이 항의하며 발언 철회와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사과는커녕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는 등의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에 장인환 의사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이 워싱턴으로 이동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 도착하자 장 의사는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스티븐스 처단을 준비한 전명운 의사가 먼저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그러나 전명운 의사는 권총이 불발되자 스티븐스과 격투를 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인환 의사는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스티븐스 저격 의거). 장인환 의사의 저격에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이틀 후 탄환제거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 체포된 장인환 의사는 미국 법정에서 2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동포사회의 끈질긴 석방운동과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10년만인 1919년 1월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민립대학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주히 활동하였다. 1927년 평양으로 귀국하여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장 의사는 1930년 5월 22일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지병을 치료하던 중 타계하였다. 장인환 의사의 유해는 동포사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 근교 사이프러스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5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장인환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2년 2월의 호국인물, ‘전명운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2월의 호국인물로 ‘전명운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전명운 의사는 1884년 6월 25일 한성부 명례방 종현(現
서울시 중구 명동 천주교성당 부근)에서 태어났다. 1903년
미국으로 이민, 하와이에 정착하였다가 1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전 의사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을사늑약 등을 체결하는데 일본을 도운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이 미국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들이 항의하며 발언 철회와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사과는커녕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는 등의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에 전명운 의사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1908년 3월 23일 권총을 준비하여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서 스티븐스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권총이 불발되자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격투를 벌였다. 이때 역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해 기다렸던 장인환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해, 스티븐스는 이틀 후 사망했다. 정명운 의사는 장인환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동포사회의 끈질긴 석방운동을 통해 6월 27일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자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한 전 의사는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최재형,
안중근이 활동한 동의회(同議會)에 참가하였으며, 미국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前 국민회) 활동을 계속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시봉사회를 조직하고,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 The Korean Brigade)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전 의사는 1947년 11월 18일 미국에서 타계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티어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4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정명운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2년 1월의 호국인물, ‘이봉창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1월의 호국인물로 ‘이봉창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이봉창(1901.08.10.~1932.10.10.)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한성부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14살 때부터 용산역 역부, 오사카 가스회사 인부 등으로 일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8년 11월 10일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관람하기 위해 교토로 갔다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11일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를 계기로 항일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이후 상하이에 독립운동 단체가 있는 이야기를 듣고 1930년 12월 상하이로 갔다.
1931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봉창 의사는 일왕을 격살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제1호 단원이 되었으며 준비한 폭탄을 받아 12월 17일 상하이를 떠나 고베와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들어갔다.
1932년 1월 8일 요요기 연병장에서 일왕이 참석하는 관병식이 거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일왕이 환궁하는 길을 노리고, 도쿄 경시청 정문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이봉창 의사는 두 대의 마차가 지나가자 두 번째 마차가 일왕이 타고 있다고 판단하여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두 번째 마차 뒤쪽, 마부가 서 있을 수 있는 받침대에 떨어지며
터졌지만, 두 번째 마차가 일왕이 탄 마차가 아닌 일왕을 수행하는 궁내대신의 마차였기에 일왕에게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9월 30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이타이현 우라와시 우라와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광복 후 윤봉길, 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안되어 1946년 7월 6일 효창원 삼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20년에는 용산구 효창동에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건립하여 이봉창 의사의 애국정신을 추모, 계승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1년 3월의 호국인물, 김교수 육군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1년 3월의 호국인물로 ‘김교수 육군대위’를 선정했다.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김교수 대위는 1923년 6월 19일 함경남도 함흥시 신보리에서 태어났다. 북한 치하에서 흥남공업대학 2학년을 수료하고,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월남한 뒤 군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육군종합학교 제32기를 거쳐 1951년 8월 18일 소위로 임관하여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속의 소대장으로 2년 가까이 고지쟁탈전의 현장을 지켰다.휴전을 불과 2주 앞둔 1953년 7월 10일,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국군 제6사단은 중국군의 최후 공세를 맞아 교암산을 둘러싸고 격전을 벌였다. 제2연대 제6중대장 김 중위(당시)는 12일 교암산 ‘가’고지의 진지를 인수했으나, 다음날인 13일 21시부터 격렬한 포격에 이어 중국군 4개 대대 규모 병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사단의 전초진지 전체가 돌파될 위기에 처한 순간, 김 중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는 진지 내로 돌입한 적 부대와 백병전을 벌이고 6차례나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14일 새벽까지 8시간 동안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중대장 김 중위를 비롯하여 제6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끝내 교암산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으로 사단은 인접부대를 주저항선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키고 금성천 일대에 전선을 정비하여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부는 최후의 순간까지 교암산 ‘가’고지를 지켜낸 김교수 중위의 공적을 기려 1953년 10월 13일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32호)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21년 3월의 현충인물, 홍준옥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1년 3월의 현충인물로 ‘홍준옥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홍준옥 지사는 188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홍준옥 지사는 도주하는 순사부장과 일경을 추격하여 투석으로 격살 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제2호에 안장하여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
전쟁기념관 2021년 2월 호국인물, 김용식 육군 일등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1년 2월의 호국인물로 ‘김용식 육군 일등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김용식 일등병(1931.2.8~1950.9.29)은 1931년 2월 8일 경기도 옹진군 부민면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전쟁의 발발로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입대한 지 1개월 만에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나와,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수도사단 제17연대 제9중대의 보충병으로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1950년 8월 24일, 제17연대는 포항 비학산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비학산은 앞선 안강-기계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부대가 마지막 방어거점을 구축한 곳이었다. 예상 밖의 강력한 저항을 맞아 국군의 공격이 지연되는 가운데, 김 이등병(당시)은 같은 소대원인 홍재근 이등병(전쟁기념관 1월의 호국인물)과 함께 첨병 임무에 자원하여 적의 진지를 기습했다. 두 사람은 적의 기관총 진지까지 포복으로 다가간 뒤 착검한 채로 돌격하여 기관총 사수와 장교를 쓰러트리고, 적 15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비록 연대는 이 날 비학산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두 신병이 보여준 용맹함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수많은 장병들의 귀감이 되었다. 김 이등병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 참여했으며, 안타깝게도 1950년 9월 29일 구리 백교리(現 교문동)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적 다수를 사살하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故 김 이등병의 전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그와 같은 날 전사한 故 홍재근 이등병과 함께 사병으로서는 최초로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호)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21년 1월의 현충인물,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1년 1월의 현충인물로 한국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는 1918년 개성에서 태어나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보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농예화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이후, 언론인 및 정치인으로 활동한 그는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장,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체육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 전부를 잃는다”는 생활신조를 지녔던 그는,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 건립을 본인의 가장 자랑스러운 공으로 여겼다. 정부는 한국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하여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 청조근정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수여하였으며, 현재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4호에 안장되어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
전쟁기념관 2021년 1월의 호국인물, ‘홍재근 육군일등병’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1년 1월의 호국인물로 ‘홍재근 육군일등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홍재근 일등병은 1928년 12월 10일 경상북도 대구시 비산동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전쟁의 발발로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입대한 지 1개월 만에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나와,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수도사단 제17연대 제9중대의 보충병으로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1950년 8월 24일, 제17연대는 포항 비학산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비학산은 앞선 안강-기계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부대가 마지막 방어거점을 구축한 곳이었다. 예상 밖의 강력한 저항을 맞아 국군의 공격이 지연되는 가운데, 홍 이등병(당시)은 같은 소대원인 김용식 이등병과 함께 첨병 임무에 자원하여 적의 진지를 기습했다. 두 사람은 적의 기관총 진지까지 포복으로 다가간 뒤 착검한 채로 돌격하여 기관총 사수와 장교를 쓰러트리고, 적 15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비록 연대는 이 날 비학산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두 신병이 보여준 용맹함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수많은 장병들의 귀감이 되었다. 홍 이등병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 참여했으며, 안타깝게도 1950년 9월 29일 구리 백교리(現 교문동)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적 다수를 처치하고 전사했다. 정부는 故 홍 이등병의 전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그와 같은 날 전사한 故 김용식 이등병과 함께 사병으로서는 최초로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1호)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12월의 현충인물, 박정수·권성호 공군 중령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12월의 현충인물로 ‘박정수·권성호 공군 중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박정수·권성호 공군 중령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대한민국 국민과 영공을 수호한 전투조종사다. 박정수 중령은 197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 48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02년 고등비행교육 과정을 1등으로 이수해 참모총장상 등을 받은 재원이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 공군의 주력기인 KF-16을 주기종으로 영공방위의 최전선에서 임무수행을 했고, 2011년 10월부터는 제16전투비행단 216대대 2편대 편대장으로서 학생조종사들의 비행교육훈련과 더불어 대대를 이끌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는 탁월한 리더였다. 권성호 중령은 1978년 강원 태백 출신으로 공군사관학교 49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2001년 공군 소위로 임관해 F-5와 KF-16 등 총 1,500여 시간의 비행경력을 보유한 최정예 전투조종사였다. 또한 우수교관으로 선정돼 참모총장 표창을 받을 정도로 후진 양성과 후배 교육에 힘써온 인물이다. 권성호 중령은 항상 후배들보다 한발 앞서 연구하고 고민해 해답을 제시해 주는 솔선수범형 교관으로 그가 훈육 담당 중대장을 맡고 있을 당시 학생조종사들이 역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일은 그의 탁월했던 리더십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2011년 12월 5일 박정수·권성호 중령은 경북 예천 상공에서 T-59 훈련기로 고난도의 ‘가상 긴급착륙(Turn Back) 훈련’을 하던 중 전투기가 조종 불능 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민가를 피하고자 마지막 순간까지 조종간을 붙잡고 탈출할 시간을 벌지 못해 안타깝게도 순직하며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긴급 상황에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던 박정수·권성호 중령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계급 특진과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과 공로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
전쟁기념관 2020년 12월의 호국인물, 해군 PC-704함 57용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0년 12월의 호국인물로 ‘해군 PC-704함 57용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지키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어 모은 돈과 정부예산을 들여 1949년 10월 17일 백두산함과 지리산함 등 전투함 4척을 도입했다. 이듬해 현지에서 정비를 마친 전투함은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출항하여 7월 25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남·서해안 해상봉쇄작전에 투입되어 유엔 해군의 작전수행이 어려운 연근해 지역의 화력지원과 해상봉쇄를 담당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50년 8월 16일 덕적도·영흥도 탈환작전 에서는 함포 지원사격 및 상륙작전을 수행하여 30여 명의 적군을 사살 및 생포하고 2개의 섬을 수복하는 등 유엔군의 해양통제권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25일 지리산함은 악천후 속에서 원산해역의 야간경비작전을 강행하던 중 적 기뢰에 접촉되어 함정이 침몰하고 이태영 함장 등 승조원 57명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 차가운 겨울바다에 던져진 지리산함 승조원들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전우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 홀로 남지 않도록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는 진한 전우애를 발휘했다. 정부는 바다에서 나라를 지킨 지리산함 승조원 전원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해군 제1함대사령부는 매년 12월 26일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해군 PC-704함 57용사는 이태영, 권순달, 김하근, 한우섭, 박찬의, 천세봉, 하윤만, 백명흠, 최수한, 고재돈, 정상관, 이봉조, 임승두, 강남주, 김인제, 윤종수, 백윤봉, 안복석, 김명철, 박호경, 이태읍, 최준우, 임선웅, 김찬석, 이몽길, 이상조, 신조근, 조영구, 정학상, 오경두, 정태용, 정승면, 이판동, 김성안, 김석준, 김경태, 박근수, 이의수, 김태훈, 김서용, 김영대, 김경옥, 손봉수, 이창용, 이영두. 김정태, 이봉춘, 이귀익, 전기석, 정휘두, 민상기, 박인식, 김옥근, 긴희곤, 노동우, 최삼천, 이영복 용사이다(계급 및 군번순).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20년 11월의 호국인물, 라희봉 경찰 경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0년 11월의 호국인물로 ‘라희봉 경찰 경감’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라희봉 경찰 경감은 1928년 1월 25일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났다. 1949년 7월 10일 전북 경찰에 순경으로 임용되었고, 1951년 1월 순창경찰서 쌍치 지서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패잔병과 지방 잔류 공비들은 덕유산, 지리산 등지에 은거하여 후방지역을 위협, 교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라희봉 경위가 소속된 전북 경찰도 합동작전에 참여했다. 쌍치 지서장으로 부임한 후, 같은 해 7월 10일에는 의용경찰대원 45명을 지휘하여 100여 명의 공비들이 은거중인 순창군 쌍치면 국사봉 일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실시, 공비 9명을 사살했다. 10월 2일에는 의용경찰대원 40명을 인솔, 구림면 금창골에서 매복 작전을 실시하여 공비 2명을 사살하고 소총 3정을 노획하는 등 공비토벌에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1월 20일 쌍치면 용전마을 뒷산 오두봉고지에 공비가 침투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용경찰대 병력 300여 명을 직접 지휘하여 수색작전을 벌이던 중 ‘항미연대’와 ‘외팔이부대’등 약 700여 명의 공비들과 마주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적이 투척한 수류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사흘 만에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라희봉 경감과 의용경찰대원 7명이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경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전북 순창군 쌍치면 주민들은 그의 애석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쌍치면 오두봉을 ‘라희봉고지’라 부르고 있으며, 라희봉 경감과 함께 전사한 7용사의 묘를 양신리 삼양마을 뒷산에 안치하고 ‘7용사의 묘’라고 부르고 있다. 2001년에는 고인의 모교인 진안 부귀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에 동상을 건립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11월의 현충인물, 김일곤 선생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11월의 현충인물로 ‘김일곤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순국선열 김일곤 선생은 1912년 3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의열단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중일전쟁 당시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대일항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김일곤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비밀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붙잡혀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비밀을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았던 선생은 17세의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반년 남짓 수감되었다가 출감했다. 1933년 여름 중국으로 망명한 김일곤 선생은 의열단에서 설치하였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군사적 지식과 군사기술을 배우고 1934년에 졸업한 후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군관대에서 의열단 제2기생으로 훈련을 받았다. 1936년 7월 민족혁명당에서 학생 특별반을 설치하고 당원들 훈련을 실시할 때 간부로 활동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분대장과 정치간사가 되어 대일항쟁에 앞장섰고, 1942년 9월부터는 진서북 지역 책임자로 일본군과 항전을 벌였다. 선생은 중국 후베이성(호북성) 숭양지구에서 일본군의 탱크 2대를 파괴한 것을 비롯해 전투 중에 적의 기관총을 탈취하고, 일본군의 완전 포위 속에서도 탈출하는 등 맹렬한 활동을 폈다. 그러다 김일곤 선생은 1943년 초 진서북의 새로운 전투지역에서 수십 배가 넘는 일본군과 교전하다 태항산(太行山) 지구에서 전사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순국선열 김일곤 선생에게 독립을 향한 위대한 업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96년 이국땅 중국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김포공항에서 유해 봉영식을 갖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
전쟁기념관 2020년 10월 호국인물, 김재호 육군 이등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10월의 호국인물로 ‘김재호 육군 이등중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김재호 이등중사는 1926년 1월 5일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에서 태어났다. 1952년 2월 육군에 입대한 그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수도 사단 제26연대 제3중대의 소총수로 배속되어 고지전이 한창이던 강원도 화천의 수도고지에 배치되었다. 수도고지 전투는 1952년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에서 국군 수도사단과 중공군이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한 휴선협상의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전개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두 달 동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도고지를 확보하지 못한 중공군은 10월 6일, 수도 사단 전방의 고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10월 6일 저녁, 김재호 일병(당시)이 속한 제26연대 제3중대는 중공군의 포격에 이어 2개 중대규모의 집중적인 공격을 맞았다. 포격에 의해 인접 전우들이 모두 전사하고 홀로 살아남은 김 일병은 진지 앞 20여 미터까지 도달한 적군을 맞아 백병전으로 이들을 격퇴했다. 잠시 뒤 새로운 적 부대가 접근하자 김 일병은 수류탄과 소총으로 이들을 다시 한 번 단신으로 격퇴한 뒤 소총 2정과 기관단총 1정을 노획하여 복귀하였다. 김 일병의 전공을 비롯한 수도사단의 감투정신으로 지난 4개월 간 계속된 수도고지 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1953년 1월 13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전협정 체결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 후 이등중사로 2계급 추서 특진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10월의 현충인물, 강천구 국가유공자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10월의 현충인물로 ‘강천구 국가유공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강천구(1968~2011) 경위는 196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98년 경남지방경찰청 순경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시민의 곁에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은 그는 중요 범인 검거 및 근무실적 우수 공적으로 경남지방경찰청장 표창을 수상하는 등 확고한 국가관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경찰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경찰관이기도 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서 ‘경찰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공공의 질서 유지에 있다.’라고 했다. 경찰관은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범죄 예방부터 수사, 교통, 경비, 대테러 등 다양한 현장의 최일선에서 근무하다 보니 늘 위험에 노출된다. 2011년 2월 마산동부경찰서 산호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강천구 경위는 2011년 3월 16일 새벽 1시부터 순찰 근무 중이었다. 2시 20분경 관할구역 소재 주점에서 신고가 접수되어, 현장으로 출동한 그는 술값 사기 혐의 현행범을 격렬한 몸싸움 끝에 파출소로 연행해 사건 처리를 진행했다. 현행범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강력하게 항의하는 피의자를 제지하며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던 강천구 경위는 사건 처리 도중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후송 도중 순직해 사랑하는 가족은 그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정부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강천구 경위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 묘역에 안장하여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과 공로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
전쟁기념관 2020년 9월 호국인물, 임병래 해군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9월 호국인물로 ‘임병래 해군중위’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임병래 해군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1950년 4월 20일 사관후보생 9기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자 8월 13일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첩보수집부대를 편성했다. 해군첩보부대는 임병래 중위 등 정보장교가 포함된 17명으로 구성되어, 8월 17일 부산에서 출발했다. 이어 8월 22일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에 상륙한 첩보부대는 3개 조로 나누어 활동을 개시했다. 임병래 중위는 인천으로 잠입하여 밤낮으로 영흥도와 인천을 오가며 첩보활동을 지휘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는 인천에 남아있던 공작원들과 접선하여 서울 지역까지 첩보 영역을 확대했다. 같은 해 9월 1일, 맥아더사령부 정보부에서 파견한 클라크 해군대위의 첩보대가 영흥도에 도착하자, 해군첩보부대는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미군 정보부로 전달했다. 그들이 보낸 정보는 인천의 적 병력·보급관계·기뢰부설 현황·상륙지점의 지형과 암벽의높이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해군첩보대원들은 안타깝게도 북한군에게 포위됐다.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이등병조와 함께 나머지 첩보대원들을 탈출시키고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최후의 순간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실제 이 사건을 모티브로 2016년 「인천상륙작전」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고(故) 임병래 해군중위와 해군첩보대원들은 영흥도 일대에서 상륙에 필요한 핵심 첩보를 수집해 해군본부와 미 극동사령부에 전달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2013년에는 해군의 유도탄 고속함 10번함을 임병래함으로 제정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9월의 현충인물, 이청호 경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9월의 현충인물로 ‘이청호 경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이청호 경사는 1971년 4월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96년 특전사 예비역 중사로 전역 후 1998년 해양경찰관으로 임용되어 특수구조단, 특수기동대, 경비함정 등 최일선에서 근무하며 국가수호와 국민의 생명보호 업무에 앞장섰다. 2011년 겨울, 우리 바다에서는 외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이 계속되었다. 인천해양경찰서 3005함 구조업무 및 불법조업선 검색팀장으로 업무를 수행하던 이청호 경사는 2011년 12월 12일 새벽, 인천시 옹진군 소청도 남서방 87km 해상에서 불법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발견하고 단속에 나섰다. 나포조의 선봉으로 제일 먼저 승선한 그는 30여 분의 진압작전 끝에 흉기로 저항하는 중국 선원 8명을 제압하고, 조타실로 진입해 선장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 순간 해경의 작전을 방해하고자 다른 어선이 배를 들이받았고 이청호 경사는 그 충격의 틈을 탄 중국인 선장이 입힌 부상으로 병원에 긴급 후송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순직하여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청호 경사가 경찰을 천직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불법조업 어선 단속과 돌변하는 해상 기상상황 등 위험한 직무에서도 가장 먼저 출동하던 그에게 “거친 바다가 무섭지 않냐”라고 묻자, 그는 “대원들이 나를 믿고 따라온다”라는 대답을 했다. 이를 통해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다.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공로로 이청호 경사에게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 묘역에 안장하여 예우를 다하고 있으며, 2015년 12월 건조된 해경 최대급 함정인 삼봉급 2번 함을 이청호함(5002함)으로 명명하여 고인의 애국심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