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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를 선정했다. 신건식 선생(申健植, 1889. 2. 13.~1963. 12. 8)은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해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후 항저우에 있는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선생은 1912년 신채호, 신규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활동에 참여하고 1925년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 등의 숙식 경비를 지원했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광복진선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1943년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과 의정원 분과위원으로 재정, 예산, 결산을 담당하며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했다. 오건해 선생(吳健海, 1894. 2. 29.~1963. 12. 25)은 1926년 경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건너가 이동녕, 박찬익 등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당한 김구 선생을 간호해 소생시켰다. 또한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과 1942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 등 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부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과 201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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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윤현진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꾼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독립운동가 윤현진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은 윤현진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4월 1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한다. 윤현진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신학문 교육을 받기 위해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 중국을 둘러보며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나 체계적인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반제국주의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에 가입해 집회와 연설, 서적 배포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와서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정되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국내의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기 위한 독립신문사 발기인 등을 맡았다.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된다. 1921년 9월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했던 윤현진은 2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현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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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했다. 1919년 1월 경성 시내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생은 1919년 2월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과 모임을 가지면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김원벽 선생은 만세운동을 추진할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고, 2월 25일, 학생대표들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사무실에 모여 만세운동의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이때 3월 1일에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진행하고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은 제2차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2월 28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이갑성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제2차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3월 1일,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을 것임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제2차 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면서 3월 1일 시위에 가급적 참가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이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서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탄압을 시작했으나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 진행했다. 3월 4일 김원벽은 학생대표들과 배재고등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현 서울역)으로 집결하기로 결정하고 5일 오전 9시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남대문역으로 나아갔다. 김원벽의 만세소리를 듣고 모여든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을 거쳐 대한문, 종로 보신각으로 나아갔다. 선생은 일제 경찰이 행사한 폭력에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후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는 등 실패로 돌아갔다. 선생은 낙향해 살다 1928년 3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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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김규면(金圭冕, 1880. 3. 12.~1969. 2. 2.) 선생을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1904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했다. 무관이 되어 조국 부강을 염원했던 선생의 꿈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1907년 훈춘(琿春)으로 망명한 선생은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을 독립전사로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1914년 이동휘와 함께 중국에서 설립한 동림무관학교를 들 수 있다. 독립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려는 선생의 노력은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결성으로 이어졌다. 3·1운동에 호응하여 결성된 대한신민단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기서 보여준 그의 헌신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1924년 윤자영과 함께 상해에서 조직한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 전개에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연해주로 갔다. 1933년 빨찌산위원회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피신한 후 더 이상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러시아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을 하지 못한 채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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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창공의 아버지, 계원 노백린 장군
계원 노백린 장군(1875. 1. 10.~1926. 1. 22.)은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한문을 배우다가 1895년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1899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에 귀국하여 육군 참위로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안창호, 이갑, 이동녕, 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고향인 송화에 민립학교 광무학당을 설립하는 등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용만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구국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무부 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으며, 그 후 제2대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어 미국에 머물면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림(金宗林)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여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1925년 3월에는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교통과 군무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던 장군은 상해에서 병을 얻어 1926년 1월 22일 순국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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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 종로경찰서를 겨누다
한지 김상옥(金相玉) 의사(1890. 1. 5.~1923. 1. 22.)는 서울에서 태어나 20세에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는 등 사회계몽ㆍ민족교육에 헌신했다.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했다. 의사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ㆍ이시영ㆍ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조국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웠다.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ㆍ권총ㆍ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인 1923년 1월 12일 밤,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여러 명을 부상시켰으며,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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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 1. 23~1979. 1. 20.) 선생을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장로교 선교사인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가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909년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상하이로 돌아온 후 YMCA에서 활동하며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주중 미국대사에게 여운형을 소개하여 주었고, 한국 독립운동가를 위한 회합장소를 제공했다. 1919년 미국에 설립된 한인구제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상하이 주재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아 적극적인 모금에 나섰고, 한인학교인 ‘인성학교’를 위해서도 모금활동을 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인해 일본경찰에 쫓기던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자택에 숨겨주었으며, 위치가 노출되자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아내인 제랄딘과 상하이를 탈출시켰다. 이후 프랑스 조계지역 언론과 경찰에 서한을 보내 일본 경찰의 한국인에 대한 불법 체포와 검문에 항의했다. 1937년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일으키자 당시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과 함께 국제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1941년에는 미얀마 랭군과 충칭을 연결하는 미얀마로드 미군 수송활동에 참여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락사항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 전달하는 첩보작전을 수행하였으며, 1942년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했다. 해방 후, 1947년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6.25전쟁 중 구호활동에 전념하다 1951년 은퇴했다. 정부는 1968년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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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의 독립운동가, 김치보(金致寶)선생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2017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김치보(金致寶, 1859. 9. 17~1941. 11. 18.)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강우규를 국내에 결사대로 파견하여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 암살시도를 지원한 분이다. 1908년 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후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돈의회 회장을 맡아 한인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1910년 성명회의 병탄조약 원천무효 선언서에 서명했고, 1911년 권업회에 참여하여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3․1운동 소식이 들려오자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했다.1919년 3월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노인동맹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9월 강우규를 국내에 결사대로 파견하여 남대문역 앞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져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4월에 해삼위천도교교구장 고문자격으로 귀국하여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를 만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의 행적은 1924년 3월까지 확인되나 이후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1996년 김치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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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이근주 선생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2017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근주(李根周, 1860~1910) 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자결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다. 선생은 1860년 2월 충청남도 홍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김복한․안병찬 등과 참여했다. 그러나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은 홍주의병 과정을 기록한「을미록」,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렵혀짐을 한탄한「절의가」, 민영환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 등 여러 항일 기록을 남겼다. 1910년 8월 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 하며 자결을 결심했다. 선생은 1910년 9월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자진․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 이근주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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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는 1900년 8월 10일, 효녕대군의 후손인 부친 이진규씨와 모친 밀양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용산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졸업한다.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의 종업원으로 일했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생으로 근무했다. 두 직장에서 일본인 직원들에게 계속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던 이봉창 의사는 이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 선생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로 생활하며 일본 생활을 익혔다. 6년 일본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의 모습을 한 한국인 청년을 의심한다. 그들은 이 청년을 계속해서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그 자는 하오리(일본식 의복)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며 그가 단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그와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이봉창 의사의 인생관에 크게 감복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일왕폭살을 위한 거사는 꼬박 1년의 준비 시간이 걸렸다. 김구 선생이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폭탄을 구하는 동안,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며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선서식을 행한지 4일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 선생에게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이윽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앵전문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을 말이 다쳤으나,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선생은 같은 해 9월 30일 오전 9시, 경찰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의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살 의거는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준다.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그들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했고, 이로 인해 이전에 좋지 않았던 한중 국민의 감정 대립도 없어진 계기가 된다. 또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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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채상덕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채상덕(蔡相德, 1862~1925) 선생을 2017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선생은 186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통군부 총장, 대한통의부 부총장, 의군부 총장을 역임하며 만주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1895년 의병에 참여했고, 1910년대 조선이 강점되고 독립의군부가 와해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2년 대한통군부 총장에 선임되었다.1923년 대한의군부를 조직하여 총재를 역임하였고 동년 여름 중국 남만주 화전현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58명과 함께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진로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1924년 성립된 참의부에 자신의 제자와 부하들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그러나 1925년 3월 밀정 이죽파의 밀고로 일본경찰이 참의부의 회의장소를 기습공격하여 다수의 전사자와 중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비통함에 빠진 선생은 제자 이수홍에게 독립군이 되어 자신의 의지를 이어 줄 것을 당부한 후,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1995년 채상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블러그-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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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의 독립운동가, 고운기 선생
2017년 9월의 독립운동가 고운기 선생은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광복군으로 활약했다. 고운기 선생은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본명 공진원, 고운기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한 이름이다. 고운기 선생은 1942년 임시정부 활동 중 병을 얻어 1943년 37세로 운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고운기란 이름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