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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9월 호국인물, 박정모 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9월 호국인물로 ‘박정모 대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의하면, 박정모 대령(1927.03.20.~2010.05.06.)은 1927년 3월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1946년 해군 신병 1기로 입대 후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1월, 해병대간부후보생 1기로 해병소위에 임관했다. 대령은 1950년 9월, 국군 제1해병연대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서울 탈환작전 당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처음으로 게양했다. 1950년 9월 27일, 당시 국군 해병 제2대대는 미 제1해병연대와 함께 마포와 서울역을 경유하여 서울 시가지를 수복하고 있었다. 박정모 소위(당시 계급)가 지휘하는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중앙청을 수복하기 위해 심야를 이용해 태극기를 지참한 채 중앙청으로 진격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앙청에 돌입한 박 소위와 양병수 이등병조, 최국방·정영검 견습수병 등 4명은 오전 6시 10분,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피탈된 지 92일 만에 중앙청 돔 난간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박 소위(당시 계급)는 이후 원산상륙작전과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정부는 6·25전쟁 기간 중 이룬 그의 공훈을 기려 을지·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휴전 후에도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1961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2010년 5월 6일 향년 85세로 타계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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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9월의 현충인물, 안치범 의사자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9월의 현충인물로 ‘안치범 의사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안치범 의인은 1988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우를 꿈꾸었고 그 꿈을 향해 도전하던 청년으로 깊은 배려와 정의로운 성격에 주위에 친구, 선·후배가 많았다. 그리고 그는 꾸준한 나눔과 봉사로 실천하는 선행자이기도 했다. 안치범 의인은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했지만 그의 꿈인 성우의 길로 진로를 정하고 본격적인 성우공채 시험을 위해 학원 근처 서울 서교동으로 독립했다. 그렇게 공채 시험에 매진하던 중 2016년 9월 9일 대부분의 이웃이 잠든 새벽 4시경 주택에 화재가 발생하자 건물 밖으로 나와 119에 신고한 후 이웃을 살리기 위해 다시 불길에 휩싸인 건물로 들어갔다. 그 위급한 순간에도 5층 건물 21세대(원룸)를 돌며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그의 용기와 의로움으로 이웃들은 모두 생명을 건질 수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5층 계단에서 유독 가스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열하루 동안 사경을 헤매다 20일 끝끝내 가족 곁을 떠나며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당시 쓰러져있던 그의 손은 뜨겁게 달아오른 문들을 두드리느라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의 의로운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을 도우다 희생한 내용의 뉴스를 보다 어머니(정혜경 님)는 “치범아 혹시 저런 일 생기면 절대 나서면 안돼,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자기 목숨이야”라고 말을 건네자, 안치범 의인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모른척할 수가 있어 그리고 내가 남을 도와야 남도 나를 돕지”라며 화답한 일화에서 그의 깊은 의로움을 엿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살신성인으로 아름다운 의(義)를 실천한 안치범 의인의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10월 의사자로 결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서울 마포구는 용감한 구민상을, 서울시로 부터는 서울시 안전상을 수상했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그 누구보다 값지게 쓴 안 의사자의 희생정신을 기려 한국성우협회에서는 명예회원으로 결정했다. 대한민국정부는 살신성인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귀감이 된 안치범 의사자를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義)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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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8월의 현충인물, 신명철 의사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8월의 현충인물로 ‘신명철 의사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숭고한 의(義)를 실천한 신명철 의사자는 1963년 10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우리 사회에 진정한 용기와 희망으로 남기고 간 그는 부모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두 딸에게는 자상하고 존경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신명철 의사자는 2003년 섬유업체를 창업하고 불경기 속에서도 여름휴가를 포기해야할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05년 8월 14일 가족들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에 시간을 내어 아내와 딸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의 수타사 계곡을 찾아 자매가 물놀이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그러다 그 날 그 행복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그 때 신명철 의사자는 딸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 2명이 급류에 휘말린 위급한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곧장 계곡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며 구해냈으나 자신은 물살에 휩쓸리며 안타깝게도 다시는 가족 곁으로 돌아 올 수 없었다. 보건복지부는 급박한 위기에 처한 타인을 구하고 희생한 신명철 의사자에게 의롭고 숭고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기 위해 2005년 12월 의사자로 결정했다. 의사자란 직무 외의 행위로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구조행위는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릎 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의미한다. 자신을 희생해 우리 사회의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남겨 준 신명철 의사자의 아름다운 용기는 온전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살신성인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귀감이 된 신명철 의사자의 공로를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하여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義)를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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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8월 호국인물, 이범석(李範奭) 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8월 호국인물로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의하면, 이범석 장군(1900.10.20.~1972.05.11.)은 1900년 10월 서울 명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여운형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주체육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했으며,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3·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이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활동하며 부대의 전투 역량 강화에도 힘을 썼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북로군정서군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으로 활동하며 시베리아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백계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4년에는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설반의 대장으로 부임하여 한인 군사간부를 양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의 핵심 부대라 할 수 있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 수행 계획을 세우는 등 항일투쟁을 적극 전개했다. 그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6년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1946년에는 조선민족청년당을 결성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크게 공헌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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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7월의 현충인물, 강태조 육군일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7월의 현충인물로 ‘강태조 육군일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강태조 육군일병은 1929년 6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다. 강 일병은 1948년 육군에 입대해 복무 중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의 미래를 위해 본인과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삶을 선택했다. 6·25전쟁 당시 강태조 일병이 속한 육군 7사단 8연대 등 국군은 북한군과 인제-원통 도로와 주변 저지대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을 확보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 없는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마침내 국군의 승리로 동부전선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1951년 4월 24일 강태조 일병이 이 전투에서 산화하며 끝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평안하게 계시오. 까마귀 우는 곳에 저 가겠소. 삼팔선 넘어 백두산 상봉에 태극기 날리며 죽어서 뼛골이나 돌아오리다. 아내여! 굳세게 새 세상사시오. 우리 다시 만날 백년의 언약.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가오니 나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소” 강 일병이 아내에게 남겨준 ‘이별가’(전문)에서 그의 우국충정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강 일병은 1949년 여름휴가를 나와 백일이 갓 지난 딸(강춘자님)을 한 번 안아보고 복귀한 뒤 ‘이별가’ 노래 가사처럼 강산이 바뀌고도 한참 뒤인 2012년 61년 만에 뼈골이 돼서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2009년 5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유해가 발굴됐으나 신원 확인에 필요한 단서가 없어 유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2010년 6월 아버지를 찾아 나선 자녀 강춘자님이 유전자를 제공하면서 마침내 유족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를 찾게 된 강춘자님은 "남겨진 한 장의 사진으로만 뵙던 아버지가 돌아온다니 꿈만 같다"며 "입대당시 불러주신 아버지의 노래 가사를 평생 잊지 못하고 내게 들려준 어머니의 한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다"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정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강태조 일병을 2011년 12월 13일 6·25전사자 발굴유해의 합동안장식을 거행한 후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3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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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7월 호국인물, 여방오(呂芳午) 일등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7월 호국인물로 ‘여방오(呂芳午) 일등중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여방오 일등중사(1928.02.13.~1953.06.09.)는 1928년 2월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나, 1952년 1월 군에 입대했다. 여방오 일등중사는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달하던 1953년 6월, 제12보병사단 52연대 9중대 분대장으로서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 812 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812고지 탈환은 서화에서 인제까지 가는 국군의 주보급로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이러한 812고지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던 북한군은 6월 8일 우세한 병력으로 파상 공격을 감행하여 52연대의 방어진지를 돌파한 뒤 812 고지 동쪽 능선이었던 쌍용 고지까지 점령했다. 위기에 처한 국군 제12사단은 쌍용 고지 탈환을 위해 여방오 일등중사가 속해 있던 9중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쌍용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던 북한군에게 번번이 무산됐다. 이에 여 일등중사는 더 이상 아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단신돌격을 결심, 아군의 항공폭격을 유도하기 위해 공중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대공포판을 메고 직접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드는 공격을 감행했다. 적진 속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곧 적과 아군 모두의 공격목표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여 일등중사는 끝까지 고지를 향해 접근했다. 죽음을 무릅쓴 여 일등중사의 유도를 받은 아군 공군기는 적의 기관총 진지에 강력한 화력을 퍼부었다. 검은 연기가 온 산을 뒤덮을 정도의 공군 공격에 힘입어 마침내 북한군의 은폐, 엄폐된 적의 기관총 진지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다. 적의 기관총 진지가 파괴되자 국군은 드디어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 일등중사는 끝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1955년 3월 1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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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6월의 현충인물, 윤영하 해군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6월의 현충인물로 ‘윤영하 해군소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제2연평해전의 영웅 윤영하 해군소령은 1973년 11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해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윤두호님)와 해군사관학교 32년 선후배 사이로 대를 이어 대한민국 바다를 지킨 영예로운 해군 명문가 충무공의 후예다. 윤 소령은 우상인 아버지와 같은 해군의 꿈을 꾸며 자랐다. 전역한 후 해운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3년 동안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생활하다 귀국하여 송도고등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사 50기로 대한민국 해군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해군 계봉함 갑판사관을 시작으로 해군 원산함 정훈보좌관, 해군 초계함 제천함 작전관으로 근무 하다 2001년 1월 참수리급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정장에 임명됐다. 윤 소령은 모범적으로 승조원들을 이끌며 성품 또한 따뜻하고 차분하여 주위의 신임이 높았다고 한다. 해사 동기인 최민석 예비역 소령은 “재학 당시 진중한 성격으로 그(윤영하 소령)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동기들이 많았다”고 회상하며 그리워했다.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4강전을 앞두고 세계의 이목이 대한민국에 집중된 시기 북한은 제1연평해전(1999년 6월 15일)에 이어 북방한계선(NLL)을 또다시 침범해 왔다. 이에 대응하고자 참수리 357호, 358호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 253편대가 긴급 출동하여 대응기동과 경고방송을 했으나 북한 경비정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리 참수리 357호를 선제 기습으로 공격하여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 이 치열한 교전은 북한군 경비정이 화염에 휩싸인 채 도주하며 우리 해군이 대한민국 서해를 지켜낼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장을 지휘하던 윤영하 소령과 다섯 분의 용사가 전사하고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영하 소령의 살신 보국 정신의 공로를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호국의지를 계승하고자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 고속함 1번함을 윤영하함으로 명명하고 2009년 6월 2일 실전 배치시켰다. 또한 불굴의 투지와 호국정신의 업적을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에 안장하여 예우하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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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5월의 현충인물, 최동문 경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5월의 현충인물로 ‘최동문 경위’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최동문 경위는 1953년 3월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교 시절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으나 굳은 의지로 독학하여 경찰공채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1980년 12월 20일 국가의 치안과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무원으로서 부산지방경찰청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첫 발령지인 부산남부경찰서 대연3파출소를 시작으로 부산남부경찰서 수사 형사과와 부산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몸담으며 민생의 믿음직한 경찰로 흔들림 없는 길을 걸어갔다. 특히 민락2파출소에서 근무하던 1985년 2월에는 강력범 검거의 공을 세우며 경장으로 특진하는 영광도 안았다. 최동문 경위는 공무원으로 임명된 순간부터 1989년 5월 3일 순직할 때 까지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많은 공적으로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엿볼 수 있다. 1985년에 IMF/IBRD경호기념장 기장(내무부장관)을 비롯하여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경비기념 기장(내무부장관)과 1987년에는 모범수사경찰관(경찰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다수의 상훈을 수여 받았다. 주로 강력계 형사로 근무한 최동문 경위는 세 차례나 흉기에 찔리면서도 끝까지 강도를 검거하는 베테랑 형사로도 명성이 높았다. 직업 특성상 위험한 상황은 늘 따라다녔고 부산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근무 중이던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학교 학내 입시부정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던 중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안타깝게도 최동문 경위를 포함하여 7명의 경찰과 전투경찰이 순직했다. 정부는 국법질서를 확립하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산화한 최동문 경위에게 경장에서 경위로 2계급 특진과 보국훈장(광복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묘역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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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5월 호국인물, 노종해 경찰 경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5월 호국인물로 ‘노종해 경찰 경감’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노종해(盧鐘海) 경찰 경감(1922.01.14.~1950.06.25.)은 1922년 1월 14일 황해도 안악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 2월 경위에 임용(경찰 간부후보생 4기)됐고, 6월에는 당시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 지서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 일대 경찰은 비상경비사령부를 구성해 각 지서에서 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적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춘천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춘천시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화천과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내평지서를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당시 내평지서에는 지서장인 노종해 경감(당시 경위)을 포함한 경찰관 10명과 내평리 일대 청년단원이 전부였다. 이들이 방어하던 내평지서는 마을 한복판인 46번 도로변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지형이 매우 불리했고 방호도 지서 주위에 마대로 참호를 쌓아올린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전차를 앞세운 적의 정규군을 맞아 노 경감과 경찰관, 청년단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다. 이들의 분전으로 소규모 경찰지서라고 얕잡아보던 적은 2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결국 82mm박격포로 포격을 가하며 응전해 왔다. 치열했던 교전에서 노경감과 경찰관, 청년단원들은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 덕에 적의 춘천 진격은 1시간 이상 저지되었고, 국군은 소양강 방어선을 구축해 결국 6·25전쟁 첫 승리를 안긴 춘천지구 전투의 초석이 됐다. 정부는 노종해 경감의 공훈을 기려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강원지방경찰청은 2016년부터 매년 고인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자료제공=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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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4월 호국인물, 최경회 조선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4월 호국인물로 최경회 조선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최경회 장군(1532~1593)은 고려 명재상 최충의 후손으로 1532년 전라남도 화순읍 삼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이다.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6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역임 했고 장수(長水), 무장(茂長) 등의 현감을 거쳐 영암 군수, 담양 부사 등을 지냈다. 장군이 모친상으로 화순 향제(鄕制)에 기거 중이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도 의병 진영의 권유를 받은 그는 상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의병장이 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자 화순과 능주 등에서 8백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으며 장군의 일가(형제, 조카, 아들 등)도 의병에 동참했다. 장군의 의병부대는 담양과 순창, 남원을 거치며 군세가 불어나 전부장, 후부장, 좌우부장을 임명하는 등 의병진영체계를 갖추게 되어 ‘우의병(右義兵)’이라는 부대명도 얻게 되었다. 전라 우의병은 금산전투, 무주대첩 등에서 대승하며 공을 세웠다. 최경회 장군은 왜군들이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집결하자 우의병을 이끌고 진주 살천에 주둔하면서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가 10만 왜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침략하자, 최경회 장군은 병사 700여 명을 이끌고 창의사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성 사수에 나섰다. 10만 대군의 공격에 맞서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려 9일 동안이나 진주성 방어에 성공했지만, 진주성은 결국 무너졌다. 장군은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 임금의 처소인 북쪽을 향해 4배(四拜)를 한 후 스스로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했다. “최경회는 동서로 적을 초토하느라 1년 넘게 노숙했으나 뜻이 조금도 태만해지지 않았다. 우병사로 승진되어서는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했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했다.” 1593년 6월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최경회 장군은 후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능주 포충사(褒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자료제공=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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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4월의 현충인물, 김종식 해군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4월의 현충인물로 ‘김종식 해군대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종식 대령은 1926년 1월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하얼빈 대도관 상업학교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광복이 되자 중국에서 단신으로 조국에 돌아와 1948년 3월 해군사관학교 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입대한 후 같은 해 9월 해군소위로 임관하고 이듬해인 1949년 2월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기념식이 거행될 때까지 선발대 요원으로 활약했다. 해병대 초창기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며 초석을 다지던 김 대령은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인 6·25전쟁이 발발한다. 김 대령을 포함한 해병대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 진동리 지구에서 수류탄전을 전개하는 과감한 공격을 펼치며 적 정찰대대를 기습 타격했다. 대한민국이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승리하며 마산을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 최정예 사단의 공격을 완전히 격퇴하고 북한의 침공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예봉을 꺾어 총반격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25전쟁사 중 처음으로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영예도 안았다. 귀신 잡는 해병대의 신화를 쓴 김 대령은 대한민국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 6·25전쟁의 운명을 바꾼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며 연전연승을 거뒀다. 1952년 3월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를 지키는 해병대 전투단 1대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삭발시켜 비장한 결의로 중공군과 결전을 벌였으며, 전선으로 출동하기 전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결의로 묘지에 「고(故) 해군(海軍) 소령(少領) 김종식(金鍾植) 지묘(之墓)」라고 팻말을 꽂아 놓고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기간 동안 해병대가 수행한 거의 모든 전투에 참전했고, 휴전 이후에는 해병대 1연대장, 헌병감을 역임하며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김종식 대령에게 구국·애국·호국의 위대한 업적으로 무공훈장(을지·충무)을 수여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1묘역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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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3월 호국인물, 강우규 의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3월 호국인물로 ‘강우규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강우규 선생(1855.07.14~1920.11.29)은 1855년 7월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했다. 이후 함경남도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이 모이자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이 시기에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연해주 일대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해 터를 잡고 이곳을 ‘신흥동(新興洞)’이라 명명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가 넘는 한인마을로 성장했고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거점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선생이 만세시위에 호응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가 새로운 총독을 임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총독 처단을 결심한다. 9월 2일, 환영행사에 참석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아쉽게도 피살에 실패하고 만다.선생은 재차 거사를 계획하다,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체포되어 1920년 2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강우규 의사의 모습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일제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의거의 주인공이 64세 백발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기 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이다. 정부는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구국 의열 투쟁의 효시가 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출처=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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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3월의 현충인물, 박경수 해군 상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3월의 현충인물로 박경수 해군 상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박경수 해군 상사는 1981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2001년 해군 부사관 188기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제2연평해전은 25분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우리군은 참수리호(357호정)가 침몰하고 6명의 용사가 전사,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는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함정과 마주보고 있던 동료 사수가 총탄에 쓰러지자 본인 또한 총탄을 맞아 중상이었으나 동료를 대신해 기관총을 부여잡고 조국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는 배만 보면 머리에 총을 맞아 쓰러진 동료가 생각났고 악몽으로 수년 동안 항해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던 박경수 상사는 강한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2009년 6월 5일 해군 2함대 22전대 천안함 보수사로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하지만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공격을 받고 전사하게 된다. 정부는 박경수 상사에게 살신보국 정신의 공로를 기려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3묘역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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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2월 호국인물, 최범섭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2월 호국인물로 최범섭(崔範燮)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최범섭(1933. 4. 18 ~ 1968. 2. 6) 육군 중령은 1933년 경기도 평택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법학과 2학년이던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를 중퇴한 뒤, 1951년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후보생 4기로 입교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소대장 및 참모장교 등을 거쳤으며, 휴전 후엔 보병학교 전술학교와 지휘참모학처 교관, 1군사령부 작전처 기획 장교 등을 역임했다. 최 중령(당시 소령)은 1966년 주월사령부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소속으로 월남군 4군단 태권도 지구대장 및 교관을 맡아, 2만 4천여 명의 관원을 지도하는 등 베트남 현지에서 태권도보급에 앞장섰다. 1968년 2월 1일, 월맹군과 베트콩은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구정을 이용해 이른바 ‘뗏(Tet, 구정) 공세’를 감행했고, 최 소령이 근무하던 껀터(Can Tho)시에도 침입,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당시 껀터시에는 40여 명의 한국 민간인 기술자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일대에 주둔한 한국군은 태권도 지구대뿐이었기에 그는 열세의 상황을 무릅쓰고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2월 6일, 최 소령은 시내에 체류하던 우리 민간인 기술자 20여 명을 우선 월남군 영내로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남은 기술자들을 수색하기 위해 재차 시내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월맹군의 기습으로 적탄에 다리 관통상을 입었고, 이를 끝까지 견디며 소지한 권총으로 월맹군 2명을 사살했으나, 결국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월남에 파견된 기술자를 보호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킨 최범섭 육군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1968년 6월 12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여 군인으로서 희생정신과 책임감을 완수한 고인의 공을 기렸다(자료출처=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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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2월의 현충인물, 오충현 대령·어민혁 소령·최보람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조국의 하늘을 지키다 산화한 F-5전투기 순직조종사 ‘오충현 대령, 어민혁 소령, 최보람 대위’를 2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F-5전투기 순직공군 3인은 2010년 3월 2일 유사시 대비 전투능력 신장을 위한 비행작전 전투태세연습 훈련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지 서쪽 약 12마일 상공에서 원인미상으로 통신이 두절된 뒤 산악지대에 추락하여 순직했다. 오충현 대령은 1990년 3월 공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20년 동안 2,792 시간의 비행경력을 기록한 베테랑 조종사로 주요 작전에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탁월한 리더쉽과 역량을 바탕으로 전투력 향상과 후배조종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어민혁 소령은 2005년 3월 소위로 임관하여 투철한 희생정신과 사명감으로 최우수 조종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하기 위해 441 시간을 비행했으며, 뛰어난 운동실력과 사격실력으로 대대사격을 전담할 정도였다. 최보람 대위는 2007년 7월 사관후보생 교육과정을 수료 후 소위로 임관하여 비행시간 301 시간을 기록했고, 남다른 성실함으로 기본비행훈련과정에서 단장상과 고등비행훈련과정에서 남부전투사령관상, 작전가능과정 교육에서 작전사령관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F-5전투기 순직조종사 3인의 공로를 인정하여 1계급 특진과 보국훈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3묘역에 안장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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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1월의 호국인물, 연제근(延濟根) 상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월의 호국인물로 연제근(延濟根) 상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연제근(1930.01.14~1950.09.17) 상사는 1930년 1월 14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에서 태어났다. 연 상사는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7연대 조교로 근무하다가 1949년 국군 3사단 22연대 1대대 분대장으로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유엔군은 일제히 낙동강선에서 반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낙동강선 방어작전을 수행 중이던 국군 3사단은 형산강 북쪽을 점령하고 있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포항 남쪽 형산강 일대까지 밀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형산강 북쪽 달전리에 있던 적 진지에서 퍼붓는 맹렬한 기관총 사격으로 진출이 불가능하게 되자 당시 22연대 1대대의 분대장이었던 연 상사는 12명의 특공대원을 결성해 9월 17일 새벽 4시경, 선봉에 서서 기관총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돌격에 나섰다. 대원들은 수류탄을 몸에 매달고 수중포복으로 형산강을 건너던 중 적의 공격으로 9명은 전사했고 연 상사도 어깨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를 견디며 연 상사를 비롯해 남은 3명은 끝까지 돌진하여 3발의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진지에 투척해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연 상사 역시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1세였다. 고인의 목숨 건 희생과 전공에 힘입어 22연대는 형산강을 도하하여 포항지구를 수복했으며 국군 3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반격작전 수행의 계기를 마련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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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1월의 현충인물, 한필순 국가사회공헌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1월의 현충인물로 한필순 국가사회공헌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필순 국가사회공헌자는 1933년 평남 강남군에서 태어났다. 한 박사는 공군 장교를 지내고 서울대와 미국 일리노이대, 캘리포니아대 등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다. 한 박사와 원자력의 인연은 1982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의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원자력연구소를 핵 개발 기관으로 의심하는 미국의 시선을 의식해 연구소 이름에서 ‘원자력’이란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역할과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 뿐만 아니라 상급기관에서는 한국에너지연구소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날이 갈수록 연구원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연구소를 떠나는 연구원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하지만 한 박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당시 중수로인 월성 1호기가 1983년 가동 예정에 있었고 박사는 이곳에 필요한 핵연료를 전량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 연구소의 사활을 걸었다. 일각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불신이 있었으나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을 돌며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연구 환경개선으로 연구원들의 사기 진작에 힘썼다. 한 박사의 이러한 열정과 헌신에 연구원들은 다시 한마음으로 뭉쳤고, 이들의 열의에 찬 노력 끝에 1985년 드디어 중수로 핵연료 양산 기술을 개발해냈다. 개발과정에서 시제품을 검증하는데 필요한 시설과 예산이 부족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한 박사는 특유의 배짱과 끈기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어 1988년에는 경수로 핵연료까지 국산화해 국내 가동 중인 모든 원전에 전량 국산 핵연료 양산 공급 체제를 구축하게 됐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중수로 핵연료에 이어 경수로 핵연료까지 국산화해내자 국내의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원자력 기관들 또한 한국의 놀라운 기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박사는 국내 원자력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에너지자립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한 박사가 주도한 중수로 및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와 한국형 경수로 개발은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이 세계적인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그 기초를 마련했다. 정부는 원자로 설계기술과 핵연료 기술을 완전 자립화시키는 등 한국 과학기술계에 눈부신 업적을 남긴 박사의 공로를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32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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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근성 경위,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12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8년 12월의 현충인물로 2011년 교통사고 현장에서 전기 감전으로 순직한 ‘배근성 경위(1969.10.4~2011.12.4)’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배근성 경위는 2011년 12월 4일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파포리 인근 지방도에서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는 사고 현장에 긴급 출동했다. 배 경위는 운전자는 무사해서 안전하게 귀가시킨 후,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중 전신주에서 떨어진 전깃줄에 감전돼 쓰러진 주민을 구하려다 함께 감전돼 순직했다. 당시 배근성 경위는 두 아들(7세, 5세)과 부인, 노모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주민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배근성 경위의 공로를 기려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묘역에 안장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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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범 소방관, 국립대전현충원 11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허귀범 소방관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0년 11월 26일 영등포소방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평소 성실하고 모범적인 허 소방관은 직업에 긍지를 갖고 솔선수범하여 동료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더욱이 1993년도에는 소방의 날을 맞아 모범공무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방관을 천직으로 여겼던 허 소방관은 출동의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임을 알면서 앞장서서 위험한 불길로 뛰어들었다. 재난현장의 최전선에서 인명탐색 및 구조작업을 병행해야하는 소방관은 물·불을 가릴 수 없고, 본인의 안전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 위험천만한 재난현장에 앞장서서 구조 활동을 펼치는 허 소방관을 보며 지인들은 어린자녀를 생각해 앞장서는 것만이라도 만류를 했으나 “불구덩이 속에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이 직업은 사명감이 없으면 못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소방의 소임을 천명으로 여겼다. 1994년 6월 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3동 내쇼날플라스틱 서울공장의 대형화재가 발생하자 허 소방관은 화점 10m 앞까지 접근하여 조기진화를 시도하였으나 불길은 계속 번져나갔다. 이윽고 11시간 만에 불길이 수그러들었고 허 소방관을 포함한 소방대원 10여명이 다시 투입되어 마지막 화재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귀범 소방관은 화재진압 도중 순직하여 주위를 슬프게 했다. 비록 36살의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천직에 목숨을 건 장한 삶을 살아낸 허 소방관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정부는 허귀범 소방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려 소방사에서 소방교로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 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공무원묘역에 제1호로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 : 대전국립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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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징 순국선열, 국립대전현충원 10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했던 언어학자 한징 선생은 1886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 우리말과 글을 지킨 독립운동가다. 어려서 한학과 국학을 공부한 선생은 15세에 사서삼경에 정통한 수재로 우리말과 글 연구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선생은 1922년부터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민족 언론 창달에 노력하였고, 1927년에는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했다. 이후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되자 회원으로 가입하고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여 합리적인 언어생활을 위해 표준어를 정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대의 아래,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작업에 선생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했다. 일제강점기의 국어사전 편찬은 ‘국권 회복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진행하던 이 사업은 자금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1936년 조선어학회로 인계되어 추진되었고 일제는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어학회 인사들을 주시하였다. 결국 조선어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선생도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 1944년 2월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선생께서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우리말 사전은 순국하신 지 3년 만인 1947년이 돼서야 ‘조선말큰사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정부는 한글운동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한 선생의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397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 : 대전국립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